짜라투스트라.
제목은 누구나 알지만 "그 책을 제대로 읽었구나"란 느낌을 받아본 사람은 여태까지 단 세 명만을 만나보았었을 뿐인 바로 그 짜라투스트라.
짜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안 종교의 주신 "조로아스터"를 의미하는 불의 신이다.
니체는 내 생각엔 이십대 중반에 읽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그 이후의 시기에 읽으면 니체가 말하는 바가 이해가 될 순 있다 해도 그 "감동"의 약빨이 거의 먹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이 서른이 되면 "시대에 안주하려는 습관이나 타성"에 대한 체질화가 자리잡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혁신적이고 경이적인 그 무엇을 본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가치평가"가 무덤덤해진다.
너무 이른 나이에 니체를 읽어서 이해를 하게 된다면 단언하건대 그는 "니체주의자"가 되지 않고는 견디지를 못할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는 짜라투스트라가 내 뿜는 "화기"에 내 전부가 타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게 해서 입은 "화상"은 아마도 평생 치유하기가 힘들 거라 본다.
망치를 들고 "우상"을 깨 부수는 철학자 니체가 "파괴"하고자 한 것-즉 우상-은 무엇이가? 그건 우리 인류 탄생 이래에 가장 허물기가 어려운 "고정관념"이었다. 다름 아니라 우리의 "윤리적 가치의 체계"이다. 당연히 그의 책 제목에서 이런 류의 냄새는 물씬물씬 풍긴다. "선악의 피안"-선과 악이란 개념은 기존의 윤리체계가 정의내린 개념이다. 이걸 초월해야 한다는 의미가 되겠다.-"우상의 황혼"..."권력에의 의지-모든 가치체계의 전도를 위해"
나이가 들어 니체를 읽는 사람은 그가 말하는 "귀족주의적 초인윤리학"의 "결론부"만을 애써 강조하고자 한다. 이렇게 되면 그의 철학은 "강도철학"의 오명을 벗기가 힘들게 된다.
나이가 어려서 니체를 읽는 사람은 그 과정부분에 완벽하게 그에게 "종속"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종속력은 그 사람의 뇌수를 지배하고 그 사람의 정신 세계 자체를 니체가 가져가 버린다. 그 이후의 과정은 설사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과정상에서 받은 "경외감"으로 말미암아 수긍을 할 수 밖에 없는 "최면"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우리에게 "무한한 감동"을 준다.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
나는 그의 귀족주의적 윤리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아담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도전해보려고 "시도"조차 해 보지 않았던 대상에 대해 적수공권으로 대적하려 했다. 그건 진정으로 초인적인 용기가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용기를 갖춘 인류역사상의 유일한 단 하나의 사람이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그것이 얼마나 가상한가?
어렸을 때에 니체를 읽으면 "공감"만을...나이가 들어 그를 읽으면 "반감"만을 가질 뿐이다. 그러기에 "공감적 반감"과 "반감적 공감"이 모두 공존하는 이십대 중반에 니체를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니체의 용기를 기억해야 한다. 그 용기는 이미 인류가 가진 무형의 가장 중요한 지적 에네르기 중 하나가 되었다. 아래의 문구는 물론 니체를 지칭해서 하는 언급은 아니다. 하지만 이 문구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확실히 니체를 빼고는 달리 그 누구를 생각한 바가 없다.
우리는 생각들에다 값을 매길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들은 값이 많이 나가고 어떤 것들은 거의 값이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으로서 생각들의 값을 셈하는가? 나는 이렇게 믿는다: 용기로서.-비트겐슈타인의 문화와 가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