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논의 역설의 오류를 생각하던 도중 (나는 무한등비수열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대충 생각하는 극한 같은 것. 그러나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는 것까지는 생각이 돌아가는데 그 뒤는 새하얗더군요. ) 어딘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글 두 편입니다. 좀 더 천천히 생각하고 싶은 마음에 퍼왔습니다.
출처 : 블로그 > 지적인 욕망을 힐난하는 매음굴
약간의 색 편집만을 거쳤습니다
이것은 "여기서 저기로 갈 수 없다"라는 또다른 제논의 역설을 보다 드라마틱한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 역설로 매우 골머리를 앓았다. 왜냐하면 이 역설은 내적 논리 자체에는 아무런 결함이 없기 때문이다. 난감한 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현대수학의 무한급수를 이용하여 이 역설이 간단히 해결된다고 말한다. 제논은 무한급수를 몰랐기 때문에 논증에 내재하는 심각한 논리적 오류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소위 무한급수를 이용한 풀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경주의 역설'은 오늘날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 지식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이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 무한등비수열이다. 무한등비수열의 합은 수렴하든지 발산하든지 둘 중의 하나인데, ‘경주의 역설’의 경우에는 아킬레스가 이전 단계에서 거북이가 있던 곳까지 달려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무한등비수열을 이루고 그 합은 수렴한다. 아킬레스가 초당 10m, 거북이가 초당 1m를 달리고 거북이가 100m 앞에서 출발할 경우, 이 무한등비급수는 초항이 10이고 공비가 0.1인 셈이다. 공식에 따라 계산하면 초항/(1-공비)=10/(1-0.1)=100/9가 된다. 결국 아킬레스는 12초가 지나기 전에 거북이를 추월한다.
그러나 이 논변은 제논의 역설을 논파하지 못한다. 제논이 말한 것이, "아킬레스는 무한한 수의 간격들을 모두 통과하여야 하고, 무한한 수의 간격들의 합은 무한대이므로 무한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결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라면 위의 논변은 적절한 반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제논 역설의 핵심은 그런 게 아니다. 단순히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단계가 필요하고 이것들을 모두 순차적으로 통과하여야 하므로 추월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현대수학을 끌어들여 말하자면, "우리가 등비 수열의 항들을 아무리 많이 더하더라도 결코 등비 수열의 전체 합에 다다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운동을 연속적인 과정으로 본다면 아킬레스의 질주는 등비 수열의 각 항을 더하는 데 빗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100/9 초 동안 1000/9 미터만 달리면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추월한다는 얘기는 제논의 역설을 전혀 손상시키지 못한다.
제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작은 양이라도 무한번 더하면 무한대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일정 간격의 시간을 시간적 무한소(즉 현재)들의 합으로 파악한다면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1초의 시간 간격을 경험함에 있어 무한한 타임-슬라이스를 경험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1초를 경험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무한한 경험의 순간이라는 무한한 단계들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논의 역설은, "시간은 순간들의 총합이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이러한 (크기가 없는) 원자적 순간들의 흐름이다."라는 우리의 상식적인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보다 정확히 말해 이러한 상식적인 전제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적 직관과 정합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나아가보자. 그렇다면 시간의 흐름이란 단지 우리의 착각일까? 시간이란 단지 우리 인식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불완전한 개념은 아닐까? 세계를 혹은 사태를 하나의 전체로 인식하지 않고 분절적인 다수로 인식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결국 이런 역설은 인식주체의 인식론적 해상도의 유한성에 의해 봉합될 수 있는 것일까? 혹은 이 역설은 내적모순이 없는 정합적인 구조는 실재 전체를 완전히 포섭하는 데 언제나 실패한다는 일반적 원리의 한 변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제논( BC 335? ~ BC 263? )
그리하여 자신의 반대자들에게 왜 운동이 잘못된 것인지를 입증하는 몇가지 사례들을 제시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이른바 "제논의 역설" 내지는 "아킬레스의 패러독스"라고 불리우는 문제였습니다.

클릭하시면 그림이 깨지지 않습니다.
이 달리기 경주의 규칙은 아킬레스는 a지점에서 출발하고 거북이는 b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아킬레스가 b지점에 도착하면 거북이는 c지점으로 가 있습니다. 다시 아킬레스가 c지점에 오면 거북이는 d지점으로...이렇게 아무리 무한히 계속된다 한들 한없이 가까워지기는 해도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영원히 추월할 수 없다는 것이 제논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아킬레스의 논증은 분명 잘못된 것이죠. 왜냐하면 현실세계에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추월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꼬집어 주는 명백한 해답이 나온것은 불과 백오십년 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그리고 해답의 단서가 잡힌 것은 적어도 뉴턴이나 라이프니츠가 "미적분"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엄두조차 못내었고요.
미적분의 기본은 "극한"개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수학에서 극한은 1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것과 1은 같은 값이라는 말입니다. 대개보면 인간의 직관은 이를 거부합니다. 미적분이 공포되고 무한소나 극한이 세상에 발표되었을때 사람들은 이를 냉소했습니다. 도대체 한없이 가까워지는 것이 어찌하여 그 가까워지는 대상과 같을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리고 전문 수학세계에서 조차 이 극한에 대한 엄밀한 수학적 정의를 내리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위대한 수학자 "코시"가 이 극한개념에 엄밀성을 부여하기까지는요.

오그스탱 루이 코시(1789~1857) 수학에 엄밀성의 개념을 도입한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
바로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도 이 극한에 대한 혼란을 던져버리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수학적 논리는 우리의 직관과 다른 진리들을 옳다고 증명해줍니다.
제논은 우선 "극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지요. 그러고 보면 극한에 대한 이해는 지금 극한을 배우는 학생들에게도 불만일 것입니다. 학창시절에 무한순환소수 0.99999...와 1은 똑같은 값이다는 이것이 왜 그리도 이해가 아니 되었을까요?
이제 0.99999...와 1이 같다는 아주 간결한 증명을 하겠습니다. 이건 물론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건 아니지만. 0.99999...는 자연수1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무한소수이지요.
0.99999...를 9로 나눈다. 그럼 0.11111...이 될 것이다.
0.11111...을 분수 표기하면 1/9이 된다.(못 믿겠으면 전자계산기를 가지고 1을 9로 나누어보라.)
그러므로 0.11111...= 1/9
이제 양변에 9를 곱해보자. 그러면 0.99999...=9/9가 될 것이다.
9/9는 당연히 1이다. 따라서 0.99999...=1
증명끝.
제논은 우선 극한에 대한 수학적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하기사 이는 그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극한은 그 이후 2천년 뒤에서야 정식화되지요.
하지만 극한개념만 가지고는 제논을 완전파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동일지점에 위치하는 것은 해결되어도 거북이를 추월하는 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니까요.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우리가 수학 교과서 처음 단원에서 배우는 "집합론"과 "기호 논리"에 그 해법이 숨어 있고요... 내가 알기로 제논의 타파전략은 두 가지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첫번째는 비트겐슈타인의 "진리표"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사실 이 방법은 일정수준의 기호조작 테크닉이 숙지가 된 사람에게만 이해가 가능하지요. 즉 학창시절에 배운 초보적 수준의 기호논리 조작 능력으로는 언감생심입니다. 이를테면 "동시부정"이라는 논리테크닉을 계속적으로 적용해야 하는데 이 증명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보았지만 추상적 논의에 비교적 익숙하다고 자부하던 나도 그 대강의 얼개만 잡힐뿐 구체적인 부분까지는 역부족임을 깨달았습니다.
단지 진리표에 의해 증명하는 이 발상는 제가 가입한 카페 "완성으로 가는 길"에서 제 소중한 이웃인 아픔님이 이야기하신 것과 거의 궤도를 같이합니다. 즉 유한과 무한의 범주적 격차를 제논이 무시했다는데에 그 단서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고 그 격차를 논리기호의 조작 테크닉으로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제논의 역설이 개연적인"느낌"에 의해서가 아니라 엄격한"논리"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트겐슈타인 불멸의 발명품 "진리표" 오늘날 디지털의 모든 언어는 이 진리표에서 응용되어 나왔다.
두번째의 방법은 "무한집합론"을 이용하는 방법인데 이것은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습니다.
19세기 수학자 칸토어는 수학적 무한에도 "계층"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수가 무한한 갯수를 지닌 것을 알지만 이것이 무한의 전부는 아닙니다. 자연수를 능가하는 농도를 지닌 무한이 또 실재합니다. 자연수를 1계층으로 보자면 이 2계층 무한을 "연속"이라고 부르지요.(수학에서는 1계층이 아니라 0계층이라고 부릅니다. "알레프 제로"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편의상 1계층으로 부르겠습니다.)

현대 집합론의 창시자 게오르그 칸토어(1845~1918) "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는 절규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1계층은 "대수방정식"의 해가 될 수 있는 모든 수입니다. 예컨대 루트2는 "x의 제곱=2"라는 대수방정식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히 자격이 있고 우리는 이걸 "대수적 무리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파이값은 이걸 만족시키는 대수함수를 도저히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삼각함수와 연관되는 특정한 "초월방정식"이 필요한데 그러기에 파이값은 1계층의 원소가 될 수 없습니다. 이 파이값 하나만 응용해도 무한량의 2계층 원소를 만들 수 있습니다. 1+파이값,2+파이값,3+파이값...하는 식으로요. 여기에 뺄셈 곱셈 나눗셈을 적용하면 무궁무진하겠지요.
1계층의 모범은 자연수입니다. 그러니까 유리수는 물론 루트가 입혀진 모든 대수적 무리수의 농도와 자연수의 농도는 동일합니다. 자연수와 유리수가 농도가 같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 "제일차 대각선 증명"인데 시간이 나면 소개하겠습니다. 1계층 무한의 특징은 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 둘 셋 이런 식으로...여기에 비해 2계층 무한은 셀 수 없는 무한입니다. 1계층과 2계층이 같은 농도일 수 없다는 유명한 "제이차 대각선 증명"은 나중에 살펴보고 곧바로 제논을 깨러 가 봅시다.
제논이 적용시킨 무한은 1계층 무한입니다. 왜냐하면 a,b,c라고 붙여진 위 그림의 지점들은 바로 자연수와 일대일 대응이 되기 때문이지요. 즉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동일시간에 지나간 지점을 자연수에 의거한 셀 수 있는 순서쌍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1-(a,b), 2-(b,c), 3-(c,d), 4-(d,e) 이런 식으로...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장 짧은 직선이라도 그 직선상에 존재하는 점들의 갯수는 2계층 무한개라는 사실입니다. 즉 거북이와 아킬레스가 지나간 거리는 무한개의 점이긴 하지만 1계층 무한이 아니라 2계층 무한이라는 야야기인데 여기서 제논의 잘못이 발견됩니다.
제논은 2계층 무한으로 구성된 직선을 1계층 무한으로 환원시켰기에 현실에는 맞지 않는 결과가 튀어나온 셈입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문제를 무한개의 지점으로 설명하려면 처음부터 직선의 연속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2계층 무한의 문제로 설정해야 했는데 제논은 2계층 연속적 무한이 아니라 1계층 이산적 무한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데에서 얼토당토않는 결과가 도출되었던 것이죠.

수학적 형식주의의 태두 다비드 힐베르트(1862~1943) 수학사가들은 19세기말과 20세기초 사이를 흔쾌히 "힐베르트-푸앵카레 시대"라고 부른다.
1계층 무한과 2계층 무한 사이의 중간농도는 존재할까요?
위대한 수학자 "다비드 힐베르트"는 20세기 수학이 풀어야 할 최고의 난제로 이른바 이 중간농도의 수수께끼를 처음으로 손꼽았지요. 20세기말 세상을 떠난 거인중의 거인 수학자 "폴 에어디시"는 "내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이 연속체 가설의 진위여부를 물어보는 것이다."고 할 만큼 어려운 문제이지만 하나의 해결책이 증명되어 나오기는 했습니다. 즉 중간농도를 인정하는 수학체계와 그렇지 않는 수학체계 모두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 정도 가지고는 아무래도 에어디시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20세기말 수학계에서 문제제기의 절대군주로 군림했던 폴 에르디시(1913~1996) 수학은 나의 수학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수학이어야 한다는 것. 수학의 연구는 골방에서 혼자 할 것이 아니라 모든 수학자에게 공개되어야 한다는 "수학적 정보공유"의 주창자이자 실천자로도 유명하다.
이제 칸토어의 대각선 논증을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길이의(편의상 0에서 1까지라고 생각하자) 연속을 나타내는 모든 지점의 수 각각은 비순환 무한소수로 표기될 수 있다.(순환무한 소수는 비순환 무한소수에 포함된다) 예컨대 0.5는 0.49999...로 표기된다(극한값에 의해)
이제 이 점들의 집합이 자연수와 같은 농도라고 생각해보자.
자연수와 같은 농도라는 것은 자연수와 일대일 대응이 된다는 말과 같다.
1 - 0.a1 b1 c1 d1...
2 - 0.a2 b2 c2 d2...
3 - 0.a3 b3 c3 d3...
4 - 0.a4 b4 c4 d4...
이런 식으로 계속 진행되어 자연수와 연속간의 완전한 일대일 대응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a2니 c3니 하는 것들은 0부터 9까지의 어떤 숫자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빨간색 대각선으로 표시된 숫자에 그것과 다른 숫자를 대입시키서 비순환무한소수를 만들면 일대일 대응에 성립되지 않는 새로운 무한소수가 나온다. 이건 자연수와 일대일 대응이 된다는 원래의 가정에 위배됨으로 최초의 가정은 거짓이 된다.
즉 다음과 같은 것이죠.
1 - 0.1234...
2 - 0.7890...
3 - 0.6592...
4 - 0.2096...
빨간색 부분의 숫자를 바꿉니다. 첫번째 열에는 1이 아닌 숫자, 두번째 열에는 8이 아닌 숫자로요. 이렇게 진행하면 새로운 무한소수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는 분명 자연수와 일대일 대응이 되지를 않겠지요. 왜냐하면 저 위에 나열된 수로 이미 일대일대응이 끝나 있는 상태니까요.
제논의 역설은 이럼으로 완전 파괴되었습니다.
물론 칸토어 자신이 제논을 직접 논파한 것은 아닙니다. 칸토어의 집합론으로 제논 해체 전법을 구상한 사람은 "버르란드 러셀"입니다.
패러독스의 예시를 들고 있었지요. 어째서 논파하는 법은 소개하지 않나 싶어서 검색해보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소개하기 힘들긴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