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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의 실존주의 인간 - 만물전 - 2007. 5. 12. 16:39
니체의 실존주의 인간에 대한 연구 - 윤동철(성결대학교 교수 )



       1. 서 론

        “모든 언어는 편견이다”. 정신의 자유에 있어서 언어의 위험을 언급하면서 니체가 한 말이다. 편견을 벗어나서 사물과 사유를 접하려는 자유정신은 니체를 따라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우리의 자유정신은 편견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니체의 자유정신에 있어서도 유효하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살펴보자. 그의 자유로운 정신이라는 것은 주체도 아니고 신의 창조물도 아니고 단지 육체에 넘쳐 분출되는 쾌락의 과도함과 즐거움을 따라 거침없이 질문을 던져보자.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이성의 허구에 불과한 것인가? 더구나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형이상학적 언어에 불과한 것인가?  인간이란 단어로 표현되면서 하나의 개념화 과정을 거치면서, 형이상학적 존재로 개념을 획득하게 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란 하나의 본질을 규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한 실존체 안에 나타나는 복합성과 다양성이 내재하는 삶의 과정을 칭하는 것인가?

       사물이 그 의미를 드러내는 현상이란 무엇인가? 본질은 어떻게 드러나고 해석되는가? 힘들은 단순히 힘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힘의 투쟁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힘의 의지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것처럼 살려는 의지인가?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니체는 힘(신)을 동일시하며 초극하는 힘을 신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적절한가?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원숭이에서 초인을 향하여 줄타기를 하는 변화의 과정에 있는가? 자연은 인간을 진화시키는 토양으로 신적 자격을 취하고 있는가? 인간은 계보학적으로 그 안에 여러 진화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가?

       사물을 바라보면서 그 사물을 표현하는 힘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사물은 어떤 힘에 의해 점유되어지고,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현상은 힘의 출현이며 다른 힘과 관계하면서 나타난다. 현상은 실재하는 힘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기호이며 징후인 것이다.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점령하는 힘들의 연속이며 그 점령을 위해 투쟁하는 힘들의 공존과 정복의 과정이다. 역사는 이 힘들의 투쟁을 통한 현상과 의미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복합적이고 복수성을 띠게 된다. 다수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사건이나 현상, 단어 또는 사고는 없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을 점령한 힘들에 의존하면서 이것이 되기도 하고 저것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복합적인 어떤 것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사물은 여러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계보학을 통하여 하나의 사물이 지니는 복합성과 다원성이 파악된다. 사물의 복합성과 다원성은 사물을 점령하고 있는 힘에 의해 가리워지게 된다. 해석은 바로 하나의 힘, 하나의 표면적 현상에 의해 가리워진 사물 자체의 복합성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니체의 힘의 개념은 다른 힘에 관계되는 힘의 개념이며, 의지는 힘의 변별적인 요소이다. 의지는 다른 의지 위에 행사하며 나타난다.  니체에게서 한 힘이 다른 힘과 갖는 본질적인 관계는 절대로 본질 속에 있는 부정적 요소로서 고려되지 않는다.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복종하게 되는 힘은 그 다른 것 또는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며, 이러한 차이를 즐긴다. 이러한 현상과 힘의 의지는 존재의 가치를 뒤로하고 변화하는 사물의 본능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게 된다. 삶의 본능을 드러내는 현상과 그 힘의 의지를 떠나서 아무 것도 그러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과도한 쾌락”이나 “넘치는 힘”을 대신할 수 없다. 이 자연 가운데 있는 삶의 본능을 떠나서 묘사되거나 규정되는 모든 개념은 허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神) 또한 사물의 힘을 떠나서는 죽은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계몽기의 실패를 일찍 목도하였던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새로운 길을 찾게 되었다. 그에게 지성이란 태초부터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통하여 시간의 경과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투쟁과 경쟁에 있어서의 도구이며 기구가 되었다. 그리하여 엄청난 선천적 가치를 가진 지성을 소유한 자는 그 지성으로 인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 진화론과 칸트의 이론이 결합된 결과 우리로 하여금 생존할 수 있게끔 처신하게 하며 작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진리요, 그렇지 못한 것은 진리가 안 된다는 실용주의적 진리관이 발전되어 나오게 된 것이다.

       형이상학적 개념을 해체시키고 진화론의 “편견”을 가지고, 디오니소스적 향락을 추구하며 삶의 본능에 과도한 쾌락이 넘쳐나기를 원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1844년 10월 15일 라이프치히(Leipzig) 근처인 프로시아(Prusia)의 작센(Sachsen)주 뢰켄(Lützen)에서 루터파 교회 목사인 칼 루드비히 니체(Karl Nietzsch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4세 되던 해에 아버지는 뇌연화증으로 사망하고 다음 해에 니체 일가는 자아레(Saale) 강변의 나움부르크(Naumburg)로 이사하였다. 니체는 14세에 포르타(Pforta)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때부터 문학과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864년, 21세에 그는 본(Bonn) 대학에 입학하였고 여기서 그리스어, 라틴어를 언어학적 입장에서 연구하는 고전문헌학을 전공하였다. 이때에 그는 슈트라우스(Strauss)의 예수의 생애(Leben Jesu)를 읽고 그 뒤에 신양성서의 원문을 공부하면서 원전비판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음 해 고전문헌학의 교수인 리츨(Friedrich Willhelm Ritschl) 교수가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으로 옮겨가자, 니체도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니체가 라이프치히를 졸업하게 되었을 때 리츨르 교수의 추천으로 1867년 24세의 나이로 스위스 바젤(Basel) 대학의 객원교수가 되었고 다음해에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바그너와 만남은 그가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이루어졌고 이때 니체는 24세, 바그너는 55세였다. 그러나 바그너는 기독교인으로 신앙이 깊어지자 니체는 격노하여 바그너와 헤어지고 그 후 바그너의 비판자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1882년 「즐거운 지식」를 집필하였는데 이 글을 통하여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였다.

       니체는 1876년 5월과 6월에 제네바 호반에 머물면서 화란 여성 마틸데 트람페다하(Mathilde Trampedach)에게 구혼을 하였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장군의 딸 21세의 지성적인 여자, 루 살로메(Lou Salome)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을 신청하였으나 또 거절당하였고, 그로 인하여 실연의 괴로움으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 사건이후 니체는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면서 이성을 상실한 그의 광기는 그 정도를 정해갔고, 결국 1889년 1월 발광하여 그의 누이의 손에 자신을 의탁하다가 1900년 8월 25일에 바이마르에서 기구한 생애의 막을 내렸다.

       
2. 인간과 신의 죽음

       니체는 신이란 연약한 인간이 만든 허구의 존재이며 실재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신의 존재는 삶의 본능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본능 가운데 드러나는 것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개념화된 신, 이 세계가 아닌 피안의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외치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신의 형상을 말했을 때,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통해서 인간이 삶의 본능에 충실한  인간의 모습을 찾기를 원했다. 그는 신을 형이상학적 존재로 보았고, 자신 자신의 초극을 위하여 투쟁할 힘이 없는 연약한 인간의 피난처로 보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통하여 힘에의 의지를 지닌 자로 표명하였고 모든 사물은 힘을 통하여 투쟁을 하고 드러나는 것이 자연이며 실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향하여 “힘있는 자는 부탁하지 말라! 울부짖지 말라! 탈취하라, 부디 탈취하라!”고 격려하면서,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그것을 가르쳐 주리라 .... 우리들이 신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대들과 내가 ..... 신은 죽었다 .... 신을 죽인 것은 우리들이다! 우리가 모두 신의 살해자인 것이다!”라고 외친다. 즉 연약한 우리의 자신이 의지하던 방패를 벗어나 초극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서 신의 그림자에서조차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신을 죽일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바다를 마셔 버릴 수 있었던가?” 그것은 계몽기의 기획에 놓여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인간 이성을 주체로 만들었고 신을 대상으로 삼았고, 계몽기를 접어들면서 인간 이성은 진리의 척도가 되었다.        인간의 주체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만들고 인간을 사고의 중심으로 세웠을 때 모든 것은 인간의 사유 속에 잠식되었다. 인간은 세계를, 바다를 그의 사유 가운데 모두 삼켜 버린 것이다. 그리고 신은 주체가 아니가 객체가 되었고 죽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참된 신이 가상의 틀에, 인간의 이데올로기적 교리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고, 이제 형이상학적 틀로 영원성을 부여받았던 것으로 여겨졌던 신이 니체의 시대에서 그 틀이 벗겨짐으로 생리학적 세계 가운데 몰락하며,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신을 매장하는, 묘 파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이 아직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가? 신이 썩는 냄새가 아직 아무것도 나지 않는가? --신도 역시 썩는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다! 그것은 우리가 신을 죽였던 것이다. ... 세계가 이제까지 소유했던 가장 신성한 것, 가장 강력한 것, 그것이 우리의 칼로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던 것이다.”

       니체의 신의 죽음은 신의 부재를 말하기보다는 신의 생성, 성장, 소멸을 의미한다. 신은 존재했고, 죽었고, 살아날 것이다. 신은 어떻게 이렇게 투쟁 가운데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가? 그것은 반동적 인간은 신의 연민이나 신의 관용을 참지 못한다. 반동적 인간은 무에의 의지를 통해서 신의 죽음을 말하고 관 뚜껑 위에 주저앉아 버린다. 이러한 반항적이며 광기어린 외침은 그의 욕동(慾動)을 따라 분출되는 대지의 과도함이 대지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신, 도덕, 이성)에 대한 구토의 증세로 표현된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신이란 디오니소스였다. “디오니소스적이란 무엇인가?--이 책 속에 그에 관한 하나의 해답이 있다. 여기서 대답하고 있는 사람은 그 길의 정통자, 신의 비의를 이어받은 사도인 것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사실 이 책의 전체는, 생성하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 있는 예술가적인 감각과 잠재 감각밖에 모른다. 원한다면 그것을 신(神)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러나 이 신은 무슨 일이 있어서도 결코 주저할 줄 모르는 비도덕적인 예술가로서의 신인 것이다. 이 책 전체는 이런 종류의 예술의 신만을 인지할 뿐이다. 파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건설에 있어서도, 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선에 있어서도 자기의 변함없는 쾌락과 독재를 고수하려고 하는 신이며, 여러 가지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충실과 과잉의 고뇌로부터, 자기 속에서 솟구치는 모순의 고뇌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려는 예술가로서의 신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문화를 동경하였다.  그곳에는 주신(酒神) 바커스의 향연을 통해서 드러나는, 즉 과도한 쾌락과 욕망으로 솟구치는 디오니소스적 요소가 풍족하였다. 니체는 그리스 문화의 한 복판에서 소크라테스의 합리성이 주도하는 이성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아폴론적 요소가 강조됨으로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적 문화가 퇴락을 길을 걷게 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도덕은 삶의 본능을 드러내지 못하고 퇴보되어야할 나약한 자들의 생존을 돕는다. 종교는 나약한 자들에게 현실에서의 도피를 돕는 “신의 나라”를 말하고 자신들을 괴롭히는 강한 자들을 처벌하는 심판의 교리를 말하는 종교를 대항하였다.  


3. 인간과 형이상학적 철학

       니체는 세 가지 형태의 형이상학적 체계, 즉 도덕, 철학, 종교에 대하여 적대감을 품었다.  첫 째는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본능과는 반대되는 합리주의적 사고를 내걸었으며, 논리와 낙관주의를 통하여 그리스의 젊은이들을 압도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무의식적인 충동이 신화적인 상징 속에서 그 표현을 얻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상징들을 개념화시킨다.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문화의 아폴론적 요소와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다루면서 소크라테스를 비판한다. 비극이란 두 개의 다른 삶의 형식의 융합이 형체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는 고전적 그리스를 찬양함과 동시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을 정당화하고 선전하려고 이 글을 썼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반대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삶은 본질적으로 디오니소스적이다. 디오니소스적 힘에는 공포와 황홀감과 도취가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디오니소스적 향연/문화/예술의 반대자로 예술의 마력적 본능을 와해시켰고, 그가 내세운 도덕, 변증법, 만족은 삶의 피로의 한 형식으로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이성으로부터 하나의 폭군을 만들어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크라테스처럼 이성을 폭군으로 삼을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어떤 다른 것도 덩달아 폭군 노릇을 할 위험이 적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합리성이 그 당시에는 구세주로 여겨졌었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거니와 그의 환자들도 자기를 마음대로 자유롭게 합리적이 되고 안되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예의상 갖추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리스의 사고 자체가 합리성에 경도할 때에 보여주는 열광은 하나의 위급 상태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위험에 처해 있었고 한 가지 선택밖에는 갖고 있지 않았다. 멸망하든가--터무니없이 이성적이라든가 … 플라톤 이후의 그리스 철학자들의  도덕주의는 병리학적인 조건 속에 있었다. 그들의 변증법 존중도 마찬가지였다. 이성=미덕=행복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소크라테스를 모방하여 영원한 햇빛--이성의 햇빛을 창출해 내어 어둠의 욕망과 맞서야 한다는 것. 어떻게 해서든 신중하고, 명철하고, 총명해야 한다는 것. 본능과 무의식에 굴복하는 것은 모두 타락의 길을 걷게 될 터이니까……”

       니체는 철학자들이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다룬 것은 개념의 미이라들이었다고 말한다.  철학자들의 손에서 현실의 그 어느 것도 살아서 빠져나간 예가 없다. 그들은 현실을 죽이고 개념에 틀에 박제한다. 철학자들, 개념의 우상숭배자들은 현존하는 모든 것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위험한 존재로 변한다. 소크라테스의 감정이나 욕망을 벗어난 이성적인 삶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 플라톤을 통하여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육체를 영혼의 무덤으로 보고 형이상학적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함으로 현실을 떠난 신념에 철학을 구축한 것이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것을 믿는 사람만 기만할 수 있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허구적이며, 거짓으로 보았다. 개념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역동적 힘을 통하여 실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느끼는 것은 감각이다. “감각은 거짓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 우리가 감각의 증거로부터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감각에 최초로 허위를 도입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단일성의 허위, 구체성의 허위, 본체의 지속성의 허위 등등을 …… <이성>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감각의 증거를 곡해하는 원인이다. 감각이 생성, 쇠퇴, 변천을 보여 주는 한, 그것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존재는 공허한 허구라고 생각한 헤라클레이토스는 그 점에서 영원히 옳으리라. <감각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인 것이다. <실재의> 세계란 날조되어 온 것에 불과하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당시의 그리스 젊은이들에게 발휘했던 매력, 그를 비극에 처해 있는 이들로부터 의사처럼 또는 구세주처럼 보이게 했던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였다. 니체는 “데카당스”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였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고귀한 정신에 대한 타락한 육체의 의미에서 사용되었다면 니체에게서는 자연 가운데 실존하는 육체적 인간이 지니고 있는 능력의 범주 밖에 있는 것을 다룸으로 육체가 지니고 있는 힘에의 의지를 타락시키는 기만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데카당스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철학자들과 종교가들이나 도덕가들의 오해이며 자기기만이라는 것이다. “가장 엄격한 일광, 모든 것에 우선시 되는 합리성, 밝고, 냉정하고, 신중하고, 의식적이며 본능이 없이 본능에 적대되는 삶은 그 자체가 일종의 병, 또 하나의 병에 지나지 않았었다”고 말한다.        

       데카당스는 인간 본능의 타락이다. 니체에 따르면, “어떤 형태로든 힘에의 의지가 쇠퇴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생리학적인 퇴행, 즉 데카당스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합리성을 근거로 인간의 본능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동물이, 하나의 종(種)이, 한 개체가 자신의 본능을 상실하고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선호할 때 나는 그것을 타락했다고 부른다. ... 나는 삶 자체가 바로 성장과, 존속과, 힘의 축적과, 힘을 향한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힘에의 의지가 결여된 곳에는 쇠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의지가 인류의 모든 최고 가치들 가운데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며--쇠퇴의 가치들이 허무주의적 가치들이 가장 성스러운 이름으로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가 규정하는 인간은 이성이나 형이상학적 체계가 아닌 자신의 본능과 싸워야 한다. 삶이 상승하고 있는 한, 니체에게 행복이란 본능과 한 가지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합리성의 추구는 데카당스의 공식이 된다. 그는 “형이상학이라든가, 신학, 심리학, 인식론 등. 또는 논리학, 응용 논리학 수학과 같은 공식의 과학, 기호학 등, 그것들을 통해서는 현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논리학을 구성하고 있는 인습적인 기호 체계가 도대체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니체가 관찰할 때, “소크라테스적” 문화 가운데 있는 인간은 허구적 토대 위에 세워진 지식을 사랑함으로써 존재가 지니고 있는 비극, 영속적인 부상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미망에 묶여있는 것이다. 비극이 실존이며 삶이고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치료하기 위하여 인간의 내부에 있는 동물적 본능, 힘에의 의지를 빼앗아가려는 또 하나의 시도가 종교적 피안의 세계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니체의 두 번째 공격대상은 종교를 향한 것이었다. 특히 그는 서구 철학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진실을 감추어 온 기독교에 대하여 맹공을 하였다. 그는 「반(反) 그리스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기독교를 미화시키거나 치장시켜 주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이러한 드높은 인간형을 반대하여 결사적인 싸움을 벌여왔으며, 이러한 인간형의 근본 충동들을 깡그리 추방해 버렸고, 그같은 충동을 증류하여 악과 악인을 만들어내고--강한 인간은 비난받을 유형으로서, <버림받는 자>로 취급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또 무력하고, 비천하고, 약질인 모든 것의 편을 들어왔으며, 강한 삶의 보존 본능에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이상을 내세웠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이지의 최고 가치를 죄 되는 것으로, 그릇 인도하는 것으로, 유혹하는 것으로 느끼도록 가르침으로써 심지어는 가장 강한 이지적 본성을 가진 인간들의 이성까지도 타락시켰다. 파스칼은 자신의 이성이 기독교 때문에 타락했을 뿐인 데도 원죄 때문에 타락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드높은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니체의 드높은 인간 또는 강한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동물적 본능을 지속적으로 초극하여 진화로 나아가는 존재를 일컫고 있다.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니체의 의식 가운데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 있다고 본 것이다. 정신은 육체의 산물이지 육체가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고 보고 있든 것이다. 육체의 진화과정에서 방출된 정신은 형이상학적 위안 가운데 안주하게 될 때에 진화가 멈추어지고 자신을 초극하기 위해 줄타기를 하는 힘에의 의지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초극되어야할 그 무엇이다. 자연의 모든 과도함이 쾌락으로 고통과 인식 속에 동시에 드러나게 될 때에, “과도”(過度)가 진리로서 폭로되었던 것이다. 진리란 과도함으로 현실의 울타리를 넘어서 가는 것, 또는 초극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묶고 있는 모든 것이 니체에게는 적이며, 공격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기독교는 시초부터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삶에 대해서 느끼는 구토요, 권태감이었다. 이러한 구토와 권태감은 <다른> 혹은 <보다 좋은> 삶에 대한 신앙 아래 가장(假裝)되고 은폐(隱蔽)되고 치장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세>에 대한 증오, 정념(情念)에 대한 저주, 미와 관능으로부터의 도피, 차안을 보다 더 잘 비방하기 위해 생각해낸 피안, 궁극적으로는 허무에, 종말에, 휴식에, <안식일 속의 안식일>에 도달하려는 욕구--이들 모든 것이 나에게는 도덕적인 모든 가치만을 인정하려는 기독교의 절대적인 의지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몰락에의 의지>의 모든 가능한 형식 가운데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가증스러운 형식처럼 생각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진화론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연민의 종교라고 규정하면서, 연민은 생명감의 원기를 북돋아주는 고무적 정서와는 대립되는 것으로 진화의 과정에서 가장 병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연민을 판단함에 있어 그것이 으레 초래하는 반응들의 가치로 그것을 판단한다면 그것이 갖는 치명적으로 위험한 성격이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체로 연민은 도태의 법칙인 진화의 법칙을 방해한다. 그것은 파멸이 가까워 온 어떤 것을 보존하고, 삶의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의 삶의 죄인으로 단절된 자를 변호한다. 그리고 그것은 각양각색의 병골(病骨)들을 삶 속에 엄청나게 많이 살려둠으로써 삶 자체에 암울하고 의문스러운 면모를 부여한다. 사람들은 용감하게도 연민을 하나의 미덕이라고 불러왔다. ... 연민은 허무를 설득시킨다. ... 직접 <허무>라고는 말하지 않고 <너머>라고 말한다. 혹은 <신>, 혹은 <참된 삶>, 혹은 열반, 구원, 행복 등에 대해서 말이다. ... 거기에는 삶을 적대하는 경향이 있다. ... 우리의 현대성 가운데서 그 어느 것도 기독교의 연민 이상으로 병든 것은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니체가 얼마나 진화론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인간을 유물론적 사상에서 전개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종교와 더불어 도덕을 거부한다. 종교가 피안의 세계를 통하여 인간의 진화를,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있다면 도덕은 겸손의 미덕 가운데 인간의 삶의 본능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하나의 원리를 정식화한다. 도덕상의 모든 자연주의, 즉 모든 건강한 도덕은, 삶의 본능에 의해 지배받는다고--삶의 어떤 명령은 <해야 한다>와 <해서는 안 된다>는 특정한 규범을 통해 완성되며, 삶의 노정에 놓인 어떤 장애나 적대적 요소는 이로써 제거된다. 반자연적 도덕, 즉 이제까지 가르쳐져 오고, 숭앙되어 오고, 설파되어 온 사실상의 모든 도덕은 그것과는 반대로 삶의 본능을 정면으로 적대한다--그것은 그 본능들에 대한 은밀한, 혹은 공공연하고도 뻔뻔스러운 단죄이다. 그것은 「신이 마음 속을 꿰뚫어 보신다」고 말함으로써 삶의 가장 깊고 가장 드높은 욕구들을 부정하고 신을 삶의 적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 삶은 <신의 왕국>이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 니체는 칸트의 도덕이성을 거부하였다. “늙은 칸트에 있어서 조차도 그렇다. 그의 정언명령에는 잔인한 냄새가 난다.” 니체는 칸트의 정언명령이 삶의 진정한 본능을 억제하고 구속한다는 의미에서 보았다. 삶의 동물적 본능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이러한 도덕은 삶의 본능을 긍정하기보다는 부정하는 원리로 파악되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은 <삶의 부정에의 의지>이며 은밀한 파괴 본능이며 퇴폐의, 비소화(卑小化)의, 비방의 원리이며, 종말의 발단이 아닐까? 따라서 위험한 것 중에서도 위험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 나의 본능은 삶을 변호하는 본능으로, 이 문제성을 내포한 책을 가지고 도덕에도 도전하였던 것이다.” 그는 도덕과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삶, 순전히 예술적이고도 반(反)기독교적인 것을 디오니소스적이라고 칭하였다.

       니체의 입장에서 인간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삶의 본능을 약화시키는 도덕은 퇴폐적인 것이었다. 유기체로서의 인간, 진화의 과정에 있는 인간은 유기체의 전체의 본질적인 성장이 있을 때마다, 개개인의 기관의 일부가 소멸하던가, 그 수가 줄던가 ... 하는 것이 유기체의 증대하는 함과 완전성의 표시일 수 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부분적 무용화도, 위축과 퇴화도, 의미와 합목적성의 상실도, 요컨대 죽음도, 현실의 진보의 조건에 속한다는 것, 즉 현실의 진보는 항상 보다 큰 힘에의 의지와 행로라는 형식에서 나타나며, 또한 항시 다수의 약한 힘을 희생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어떤 <진보>의 크기는 그 때문에 희생되어야만 했던 모든 것의 양 여하에 따라 측정된다.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개개의 뛰어난 억센 인종의 번영을 위해서 희생된다는 것--이것이야말로 진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개개의 뛰어난 억센 인종의 번영을 위해서 희생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란 창조의 정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줄타기를 하는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란 결코 창조의 정점이 아니다. 모든 창조물이 인간과 나란히 인간과 동일한 단계에서 완전을 향해 서 있는 것이다. ... 인간이란, 상대적으로 말해서, 가장 성공하지 못한 동물, 가장 병약한 동물, 자신의 본능으로부터 가장 위험하게 벗어난 동물이다.” 병약하고 본능으로 벗어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본능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두고 길들이고 기계화시킨 데 있다. “동물에 관해 말할 것 같으면 데카르트는, 존경할 만한 대담성을 가지고, 동물을 기계라고 생각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우리의 모든 생리학은 그 명제를 증명하려는 데 전념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논리상으로도 데카르트처럼 기계라고 알고 있을 정도로 진짜 지식이 되어 있다. 이전에는 인간에게 한층 높은 질서로부터의 선물로서 <자유의지>라는 것이 주어졌었다. 오늘날 우리은 인간으로부터 의지까지도 빼앗아버렸다. 의지가 이제는 더 이상 하나의 능력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뜻에서이다.”

       니체는 외향성을 향한 인간의 야수적 본능이 이제 자기 자신을 공격하게 된 것이 양심의 가책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에, 자기 자신다운 것에 괴로워하는 법이다. 이것은 인간이 야수적인 과거에서 억지로 떼어버린 것의 결과, 말하자면 새로운 상태와 새로운 생존조건 속에 뛰어들었던 것의 결과, 이제까지 그의 힘과 즐거움과 공포의 근거였던 오랜 본능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한 결과였다. ... 폭력에 의해서 잠재적인 것이 되어버린 자유의 본능 ... 되밀어내지고 뒷걸음질치고 마음 속에 유폐되어 마침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폭팔하게끔 된 이 자유의 본능, 오직 이것이야말로 양심의 가책의 시작인 것이다.”

       니체의 인간은 도덕으로 인해 나약해지고, 본성이 도덕으로 인하여 감금되고 자신 자신을 학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이성에 의해 광기가 제거되고 감정이 억압당하고 본능이 퇴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기독교의 신과 신의 나라는 나약하고 도태되어야 할 인간들에게, 나약한 인간을 괴롭히는 강한 본능을 지닌 우수한 인간들을 약한 자를 위하여 보상적 심판을 집행하며, 그들을 위한 피안의 세계와 도피처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는 바로 선조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강압적 의무로부터 발생했으며,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거룩한 신성의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체계는 거짓되고 허무한 <정신>과 <신>을 강조함으로 <대지>와 <본능>을 데카당스로 이끌어갔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렇듯 영원하지 않고 목적도 아니고 아직 존재도 아닌 진화론의 과정에 있는 삶의 형태라면, 원숭이에서 초인으로 향하는 진화론의 줄기 위에 재주를 부리는 위험한 실체라면 거기에 어떤 희망이나 가치는 사라지는 것이다. 니체는 「도덕적 계보」에 실린 제3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의 의지” (Was bedeuten asketische Ideale?>에서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를 필요로 한다. 이 의지는 아무 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한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4. 허무주의와 초인

       니체의 허무주의는 지금까지 최고의 가치들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무가치하게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모든 존재자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최고의 가치들, 신, 종교, 도덕, 철학이 무가치하게 될 경우 그것들에 근거하는 존재자들도 무가치하게 되는 것이다. 가치의 상실감, 모든 것이 공허하게 되었다고 느낄 때 일어나는 심리적 박탈감, 자신의 삶의 목표가 무너지고 가치를 잃게 되었을 때 느끼는 허무한 심리적 상태에서 니힐리즘은 대두된다.

       우리는 이러한 무의미함에 대한 승인을 니힐리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니체도 지적하듯이 니힐리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첫째로 니체가 세계의 무의미함이 제공해 주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니힐리즘이 하나 있다. 이것을 소극적 허무주의 혹은 염세주의적인 허무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소극적 허무주의는 현실에서의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허무주의를 피해서 피안을 세계를 마련하는 자들을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이며, 종교가들이며, 도덕가들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니힐리즘은 능동적이면서도 미학적이다. 니체는 이 니힐리즘을 현대화 탈현대의 존재를 위한 올바른 태도로 진단한다. 허무로부터 물러나는 대신에 그들은 주어진 현실을 삶의 본능을 위해 주어진 최선의 장으로 생각하고 그 위에서 춤춘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존재에 맞는 세계가 없다고 무의미나 무가치의 실망에 젖어 한탄하는 대신, 그러한 세계를 창조하려고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연적 제약과 한계에 의해 구속되지 않고, 주어진 환경을 초극함으로 자기 자신이 존재의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니체가 “미래의 신화”, 즉 서구문명에 드리워져 있는 니힐리즘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신화를 도입하는 것은 「짜라투스트라」에서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니체가 기독교의 사복음서와 비교하여 제5복음서라고 말했고, 기독교 교의에 대한 풍자로서 새로운 디오니소스적 철학을 주신찬가(酒神讚歌)식으로 고지(告知)하였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커다란 고양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스스로 초인이 되었다고 여겼다. 1884년 2월 그의 친구 로오데에게 보내는 서신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이 짜라투스트라로서 독일어를 그 완성에 이르게 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것은 루터와 괴에테 뒤에 더욱 일보를 나아가게 한 셈이다. --생각애 보려므나, 오랜 동안의 마음의 벗이여, 박력과 유창함과 화음의 세 박자가 이렇게 어울려 있었던 일이 일찍이 독일어에 있었던가 없었던가를.” 프렌쩰은 「니이체의 생애와 사상」에서 그가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자기신격화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성경에 예수가 황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사실에 대하여, 니체는 신의 죽음이라는 현대의 니힐리즘적 상황을 자각했으며,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도덕의 파괴자라는 면모를 갖는다. 한편 짜라투스트라는 도덕의 파괴자에 그치지 않고 「도덕의 자기 초극」, 「성실로 말미암은 도덕의 자기 초극」을 실험하는 인물이다. 「성실로 말미암은 도덕의 자기 초극」은 니체가 현대의 니힐리즘적 상황을 설명할 때 즐겨 사용하는 근본적 주제의 하나다.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세계와 역사에 대한 도덕적 해석에 있으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종래의 도덕을 대표하는데, 종래의 도덕, 곧 기독교적 도덕 자체가 그 성실성을 고도로 발달시켜, 이 성실성이 도덕 자체를 부정하고 도덕을 넘어선 경지에 이르는 것이 「도덕의 자기 초극」이다. 니체에 따르면, 「도덕을 키워 온 여러 힘 중에는 성실성이 있었다. 이 성실성이 드디어 도덕에 반항하고 그 목적론, 그 타산적 고찰을 폭로한다.」

       그러면 도덕의 자기 초극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니체가 말하는 성실은 진리와의 합치이며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이다. 곧 도덕의 자기 초극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이다. ... 곧 종래의 도덕이 완전한 자기 상실이었던데 비해 도덕의 자기 초극은 인간이 현재의 자기를 초극하여 본래의 가기 자신을 회복하는 것, 곧 참된 자유를 달성하는 것이다. 이 책 제1부 「세 가지 변화」에 나오는 낙타, 사자, 어린애의 3단계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인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진 낙타는 의무와 금욕을 상징으로 「그대는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타율적 도덕에 복종한다. 도덕을 지키는 자들은 병약한 자들이며, 니체에 따르면, “병들어 죽어 가는 자들이야말로 육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천상적인 것과 구원의 핏방울(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 또는 성찬식의 포도주)을 발명해 낸 자들이다."

        낙타는 사막에 가서 「사자」로 변하는데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고독을 견뎌 내며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한다. 곧 가혹한 자기 부정에 철저한 자유 정신, 비판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사자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를 확보한 데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새로운 창조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자기 긍정을 하는 어린애의 단계에서 비로소 가능하며, 이 단계에서 비로소 참된 자유가 달성되는 것이다. 어린애는 각성자이며, 잘 아는 자로서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육체이며, 육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영혼은 육체에 속하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반 그리스도에서, “우리는 더 잘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모든 점에서 더 겸손해졌다. 우리는 더 이상 <정신>이라든가, <신성>이라든가 하는 것 속에서 인간의 근원을 찾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이 가장 교활하다는 이유로 가장 강한 동물로 간주한다. 그의 정신성은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여기서도 드러나려고 하는 허영심, 즉 인간이 동물 진화의 비밀스런 위대한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허영심을 갖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조심해야한다”고 말하였다.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 의지하여, 인간은 육체이고 대지이며 초월한 짐승이라고 보았다. 도덕에 관하여 그는 말하기를 “초월한 짐승--우리 내면의 야수는 기만당하기를 바라고 있다. 도덕이란 그 야수에게 잡아 찢기지 않으려는 방편적인 거짓말이다. 도덕의 가정에 오류가 없었다면 인간은 짐승에서 머물렀으리라.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고상한 어떤 것으로 여겨서 엄격한 규율을 스스로에게 짐지웠다. 그것 때문에 인간은 짐승 가까운 곳에서 그치고 만 단계를 증오하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노예를 비인간으로서, 물건으로서 경멸했던 과거를 설명할 수 있다.”

       니체는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이란 초극되어야 할 어떤 것이로다. 그대들은 인간을 초극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였던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초인이란 대지의 뜻이로다. 그대들의 의지는, 초인이란 대지의 뜻이라야 한다고 말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부디 원하노니, 나의 형제여, 대지에 어디까지나 충실하라, 그리하여 그대들에게 초지상적인 희망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부디 믿지 마려므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해독자로다. 그들의 삶의 경멸자이며, 거의 시들어버린 자이며, 스스로 독을 머금은 자로다. 그와 같은 무리들에게 대지는 지쳐버렸노라. 그러므로 그들은 죽어버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로다! 일찍이는 신을 모독하는 것이 최대의 모독이었노라, 그러나 신은 죽었노라.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들의 모독자도 죽어버렸던 것이로다. 대지에 대한 모독이 이제는 가장 무서운 것이로다. 그리고 대지의 뜻보다도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의 내장은 훨씬 더 존중하는 것도 역시! 일찍이는 영혼이 육체를 경멸하며 내려다보았노라. 그리고 그 때에 있어서는 이 경멸이 최고의 것이었노라. -- 영혼은 육체가 더욱 더욱 메마르고 처량하게 되어, 아사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로다. 그리하여 영혼은 육체와 대지로부터 벗어나려고 생각하고 있었노라.”

       니체는 여기서 인간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인간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극복한다는 것은 인간 가치의 변환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란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의 죽음이 없이는 인간은 가치 변환을 추구할 수 없다. 초인은 신의 죽음을 말하고 더 높은 인간을 향하여 나아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신이 부여하였던 인간의 가치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측정될 때에만 인간은 가치 변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니체는 가치변환을 이루는 새로운 방식을 취하기 위하여 종교, 철학, 도덕을 향한 맹공을 퍼부은 것이다. 그리고 가치평가의 전환을 통하여 고차원적 인간의 이론이 취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가치를 무가치하게 만들고 허무주의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영겁회귀의 길을 걷는 것이다. 허무주의를 통해 긍정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영겁회귀하는 것이다. 초인은 영겁회귀한다. 회귀하는 것들은 반동적인 힘들에 의존하다. 인간의 본질은 힘들의 반동적 생성이며 보편적인 생성으로서의 생성이다. 인간의 본질과 인간에 의해 점유되는 세계의 본질은 모든 힘들의 반동적 생성, 니힐리즘일 뿐이다.

       니체는 보다 높은 인간과 초인을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 초인은 자신을 반동적인 힘에 의지하며 니힐리즘을 통하여 가치변환을 추구한다. 그러나 고차적 인간이란 가치를 뒤집고 반동적 행위를 능동적 행위로 바꾸는 것에 그친다. 단지 현재의 인간보다 높은 이상으로 만족한다. 초인은 끊임없는 가치를 무로 돌리고 니힐리즘의 영겁회귀와 더불어 부정을 긍정함으로 다시 힘에의 의지를 가진다. 긍정은 부정을 능가하지만 더 이상 이룰 것이 없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초인은 거기서 다시 니힐리즘을 통하여 가치변환을 추구하고 끊임없는 반동적 생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거기에 삶의 약동과 생명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초인은 겨울의 죽음 같은 곳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대지인 것이다.


       
6. 결론

       “모든 언어는 편견이다.” 그는 글을 쓸 때마다 편견에 젖어 있었다는 말을 거부할 수 없다. 심리학과 예술, 가치에 대하여 논할 때 그 모든 것은 아마도 이전에 사고가 합리적 형이상학이었다면, 니체의 사상은 심미적(Gestalt) 형이상학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심미적 형이상학은 진화하는 가운데 생겨난 것으로 보았다. 니체의 인간은 진화론 가운데 있고 삶의 본능은 대지의 깊이에서 솟아오른다. 그리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정신은 육체로부터 분출되어 나온 것이지 고등한 기원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니체가 생각할 때에,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 가식적인 것을 벗어버려야 하는데 그것은 합리적 이성의 형이상학, 도덕, 그리고 종교였다. 진화란 결국 더 야수적 삶의 본능으로 복귀이고, 형이상학적 진리나 종교적 진리 그리고 선을 추구하는 것은 존재의 나약함, 의무에 사로잡힘, 그리고 피안의 세계에 대한 동경의 허구적 틀을 부수고 그런 것들의 가치를 무가치로 받아들이고 반항적 힘들을 표출함으로 초극하는 것이다. 결국 니체의 초인이란 삶의 본능의 근원적 힘의 의지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 모든 무가치를 통하여 가치변환을 추구하는 과도한 쾌락과 정열만이 끊임없이 긍정을 허무로 대함으로 긍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초극하는 초인이 되는 것이라면, 초극을 이끌어 가는 인식의 주체는 없는 것인가? 긍정을 비판하는 정신은 대지에서 오는 것일까? 대지 안에서 스스로 이루어 놓은 긍정을 스스로 부정할 수 있는가? 인식의 출현이 육체적 본능의 퇴폐, 데카당스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결국 진화하는 초인은 야수적 본성은 인식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이성이 없는 광기가 창출하는 예술은 어떤 것이며, 그 초인은 어떤 존재인가?

       니체는 존재자 자체를 가치로 해석하였다. 결국 심미적 상태에서 지니는 가치는 존재자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이다. 니체에게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변환되는 가치에 있는 것이다. 원숭이로부터 인간 그리고 초인으로 가는 줄타기를 하는 무엇으로서의 가치이다.  결국 심리적 형태의 니힐리즘은 현대적 형이상학이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권력에의 의지이며--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너희 자신도 또한 권력에의 의지이며--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심리학은 권력에의 의지가 갖는 제(諸)형태와 제(諸)단계들에 대한 설이다. 이미 데카르트의 인식은 심리학의 일부였다. 단지 심리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하고 있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자신이 새로운 신을 가르치려고 하였고, 실로 자신이 신적 존재가 되려고 하였다. 예수를 죽음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신의 탄생을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짜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을 말하고 자신을 초극하는 자로서 신적 가치의 존재이다. 즉 끊임없이 자신을 초극하여 다음 단계의 목적에 이르는 힘, 힘에의 의지는 니체에게 있어서 신(神)인 것이다. 이 디오니소스적 신은 허무주의를 통하여 반항적 힘을 통하여 자신을 초극하는 초인인 것이다. 이러한 신은 강해야 하며 자신을 초극해야하기에 늘 긍정에만 의지하는 나약한 인간을 보호하거나 병약한 자들을 남겨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 진화의 과정을 퇴화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도덕을 폐기하고 성실하게 살아감으로서 도덕을 극복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도덕을 폐기하고 용기를 가지고 투쟁하고 야수성을 드러낼 때에 인간은 점점 더 강해지고 더 드높은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광기에 차고 무질서하며 정신의 귀중한 소산을 상실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끌어가던 양심의 도덕을 버림으로 짐승이 되는 것이다. 니체는 결국 양심의 가책에 대하여 “양심을 깨문다는 것은 개가 돌을 깨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니체가 순수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순수한 정신은 대상이 없이 홀로 파악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으면서 대상을 파악하는 힘이라면 주체인 것이다. 주체는 대상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순히 변천하는 과정의 가치가 아니라 존재이며 목적이다. 타자를 대상화하는 지력(知力)은 주체의 의식이다. 이것은 그 기원이 물질 또는 대지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精神)의 소산인 것이다.  

       그는 형이상학적 구조의 구성체인 개념의 세계를 배격하였으나 개념의 세계는 역동적 삶의 세계에 대한 표현이 지니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경험과 함께 혹은 인식과 함께 연동하여 의미를 전달한다. 개념은 허구의 틀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언어가 편견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읽고 해석하는 해석자의 경험이 의미생성에 역동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모든 인식구조가 그렇다. 인식구조는 인식자의 경험과 더불어 이해된다. 허구적 틀이 틀로서만 이해된다면, 인식구조의 형태가 그대로 전달되지 않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이 역동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진행과정에서 생겨난 정신이라면 그 정신은 야수성에 젖어 있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정신은 보이지 않는 생각의 공간에 정형의 틀 또는 역동적 패러다임을 구성하고 나아갈 정향성을 설정한다. 그 정향성의 목적지에 신의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 근원에 신의 손길이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 신의 참여가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증명이 없이 왜 필자는 신의 손길(창조), 참여(사역), 의지(구속)가 있다고 말하는가? 신(神)은 내 삶의 기원이기에, 인간은 신을 느끼고 참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긍정의 신이든, 허무주의의 신이든, 아니면 기독교의 신이 되었든 그는 “잠자는 신”의 부정을 통해서 “활동하는 신”을 찾는 것이다.

       니체는 형이상학적 신의 죽음을 말하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과도함 쾌락 그리고 힘에로의 의지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그가 비판한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덴의 스토아학파들과 논쟁을 하며 소개한 바로 그 신이다. 바울은 “그(神)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전하였다.

       니체가 겪었던 19세기의 기독교에 있어서 자유주의는 참된 하나님을 이성의 사유에 가두거나 지나치게 현실을 외면함으로서 니체나 칼 막스(Karl Mark)를 낳았던 것이다. 니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종교를 거부하였다. “무신론자로 그의 궁극적 관심이 그에게 신(神)”이라는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평가는 아마도 니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는 결국 신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이 신을 만들려는 기획을 하였던 것이다. 짜라투스트라와 그 이후에 저작들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그는 말년에 이성을 상실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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