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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국민군의 지도자로 스페인 내전(1936~39)에서 스페인 민주공화국을 전복한 후 죽을 때까지 스페인 정부의 총통을 지냈다.


프랑코 [1892.2.14 엘페롤 ~1975.11.20 마드리드]  
본명은 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ódulo Franco Bahamonde.
별칭은 El Caudillo ('지도자'라는 뜻)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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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철거된 프랑코 동상

프랑코는 스페인 북서부지방의 해변도시이며 해군기지인 갈리시아의 엘페롤에서 태어났다. 스페인 해군 행정부대 소속의 장교였던 아버지의 성격이 괴팍하고 낭비가 심하며 방탕하여 어린시절의 가정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같은 또래의 다른 소년들보다 절제되고 진지했던 프랑코는 경건하고 보수적인 중상류층의 가톨릭교도였던 어머니와 가깝게 지냈다. 가문의 전통을 이어 프랑코도 처음에는 당연히 해군장교로 입신하려 했으나 해군사관학교의 입학 정원이 감축됨으로써 부득이 육군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7년 14세의 나이로 그는 톨레도의 보병사관학교에 들어가 3년 후 졸업했다.

프랑코는 1909년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시작된 식민지 전쟁에의 출전을 지원해 1912년 19세의 나이로 현지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그는 모로코 출신 기병의 정예 연대에서 중위로 승진했다. 스페인의 많은 장교들이 무질서하고 직업군인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상황에서 젊은 프랑코가 부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임으로써 그는 곧 군인정신이 투철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부대작전을 준비하는 데 대단한 정성을 쏟았으며, 부대원들의 복지에 보통 이상의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양심적이고 정직하며 내성적이었으며, 가까운 친구가 적은 편이었고 천박한 오락을 기피했다. 1915년에 그는 스페인 육군에서 최연소 대위가 되었다. 이듬해 복부에 탄알이 박히는 중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스페인으로 후송되었다. 1920년 그는 새로 편성된 스페인 외인부대의 부사령관으로 뽑혔고, 1923년 총사령관직을 물려받았다. 그해에 그는 카르멘 폴로와 결혼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낳았다. 모로코 반군과의 중대한 전투에서 외인부대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코는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으며, 1926년 33세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1928년초 사라고사에 새로 설립된 일반육군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 군주제가 무너진 후 새로운 스페인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극히 반군사적인 정책을 채택하여 프랑코의 출세길이 일시적으로 막혔다. 일반육군사관학교가 해체되었고, 프랑코의 이름은 대기 장교 명부에 올랐다. 프랑코는 공공연한 군주주의자였고 왕실 고문관이라는 영예를 누렸지만 신정부와 자신의 일시적인 강등을 받아들였다. 1933년 보수 세력이 공화국의 정권을 장악하자 프랑코는 현역 지휘관으로 복직했고, 1934년에는 소장으로 승진했다. 1934년 10월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광부들이 우파 의원 3명의 입각에 반대하여 봉기했을 때 프랑코는 반란 진압군 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여 새로운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35년 5월 스페인 육군 참모부장으로 임명되어 그때까지 공화국 초기의 반군사적 정책으로 인해 크게 약화되었던 군기강화와 군사시설 보강작업을 시작했다. 중도우파 정부는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는 데 실패하여 와해되고 1936년 2월 총선이 공고되었다. 이무렵 스페인의 정당들은 우익의 국민당 진영과 좌익의 인민 전선으로 양분되었다. 총선 결과 좌익이 승리했지만, 신정부는 스페인의 사회·경제 구조의 가속화되는 붕괴를 막을 수 없었다. 프랑코는 정당에 가입한 적이 없었지만 나라가 무정부상태로 치닫는 것을 보다 못해 정부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도록 진정했다. 그의 진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참모부장직에서 해임되어 카나리아 제도의 한직으로 쫓겨났다. 한동안 그는 반정부 군사음모에 가담하기를 거부했지만, 정당제도가 붕괴되자 반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코의 군사반란


1936년 7월 18일 새벽, 군사 반란을 지지하는 프랑코의 성명이 카나리아 제도로부터 방송되고, 같은 날 아침 본토에서 반란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프랑코는 모로코로 가서 24시간 이내에 스페인 육군 수비대의 엄중한 보호망 속으로 들어갔다. 프랑코와 그가 이끈 군대는 스페인에 상륙한 후 정부군이 장악하고 있는 마드리드를 향해 진격했다. 국민군의 전진이 마드리드의 교외에서 저지되었을 때, 군의 지도자들은 마드리드와 전국을 해방시켜 장악하게 될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공화국에 대항하는 반군 국민당 정부의 수반 겸 총사령관 또는 총통을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군사적인 역량과 권위가 있는 데다가 파상적인 책략과 음모에 가담한 정치적 흠도 없고,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로부터 군사원조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입증되어 그가 단연 적임자가 되었다. 스페인의 전형적인 '정치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도 작용하여 프랑코는 1936년 10월 1일 새로운 국민당 정부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반군 정부가 전국을 완전히 장악하기까지는 3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프랑코는 기본적으로 군사독재적인 정부를 관장했지만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문관체계의 수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주로 반좌익적인 중류계급에서 문관들을 차출하기로 했다. 1937년 4월 19일 그는 팔랑헤당(스페인의 국수주의 정당)을 재편하여 반군 정부의 공식적인 정치운동단체로 삼았다. 팔랑헤당을 보다 다원적인 집단으로 확대시키는 동안 프랑코는 정부가 당을 이용하는 것이지 당이 정부를 이용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럼으로써 그의 정부는 제도화된 권위 조직이 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식의 파시스트 정당국가와는 달랐다. 내전중에 총사령관으로서 프랑코는 신중하고 조직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결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그의 군대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전진하는 동안 2번 정도 일시적인 패배밖에 하지 않았다. 군사활동중 그가 받은 비판은 전략이 다분히 상상력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군인들의 자질이 우수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막대한 원조로 프랑코는 1939년 4월 1일까지 완전무결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내전은 주로 유혈이 많은 소모전으로 이어졌고 양쪽 모두 잔학행위가 심했다. 수만 명이 국민당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처형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몇 년 동안 계속되어 그의 통치에 있어서 다른 어떤 면보다도 더 많은 비난을 받은 원인이 되었다.


 

프랑코의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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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Franco

프랑코는 내전이 끝난 후 스페인의 영광을 회복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페인은 여전히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희생이 많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그의 정부의 안정은 5개월 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더욱 위태로워졌다. 프랑코는 처음에는 히틀러가 도발이 없었는데도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를 공격한 것에 충격을 받고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신중하게 피했다. 프랑코의 가장 뛰어난 정치적 업적은 전시외교였다. 그것은 냉철한 현실주의와 신중함이 특징이었다. 만일 히틀러가 신속하고 전면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면 프랑코는 기꺼이 독일 편에서 참전했으리라는 것을 시사하는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현실이 그렇지 않았으므로 그의 정부는 히틀러에게 비교적 동조적이면서도 직접적인 외교적·군사적 개입을 신중하게 피하는 입장을 지켰다. 히틀러는 1940년에 프랑스의 앙다예에서 프랑코와 면담한 후 그와 같은 협상회의를 또다시 하느니 '차라리 자기의 이를 서너 개는 뽑아버리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프랑코 정부의 가장 어려운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시작되었다. 새로 조직된 국제연합(UN)이 그의 정부를 배척한 것이다. 프랑코는 적대적인 외국의 여론에 의해 '마지막으로 남은 파시스트 독재자'로 낙인 찍혔으며, 한동안 서방의 국가원수들 가운데 가장 미움받는 국가원수로 여겨졌다. 그러나 국내에는 그의 지지자가 그의 반대자 못지않게 많았다. 소련 진영과 서방세계의 관계가 악화되어 냉전상태가 절정에 이르면서 그에 대한 배척이 끝났다. 프랑코는 이제 세계의 지도적인 반공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1948년에는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 정상화가 시작되었다. 국제세계에서의 그의 복권은 1953년 스페인이 미국과의 10개년 군사원조협약에 서명함으로써 더욱 증진되었는데, 이 조약은 후에 보다 제한된 형태로 경신되었다. 1950, 1960년대에는 그의 외교정책이 어느 정도 유연해졌으며, 그의 정부가 창조적인 발전을 위한 역량으로 지속됨으로써 그는 비판자들 가운데 일부로부터 최소한의 존중을 받을 수 있었다. 프랑코는 정부의 부담을 특별히 무거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사실상 그의 통치는 절대적인 자신감과 비판에 대해 비교적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온건한 자유주의자들로부터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파악에 탁월했는데, 그들의 지지가 그의 정권이 존속되는 데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 사이에서 신중하게 균형을 유지했으며, 정책의 집행은 자기가 임명한 사람들에게 대부분 맡김으로써 일상적인 정치적 갈등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중재자로서 처신할 수 있었다. 실패했거나 인기가 없는 정책에 대한 비난은 개개의 장관들이 주로 받게 되었다. 집권 팔랑헤당은 1940년대초에 격하되었으며, 그 이후로는 단순히 '운동'으로만 알려지고, 본래의 준(準)파시스트적인 성격을 많이 상실했다.

권위주의적인 우익 정부를 이끌어가는 대부분의 지도자들과 달리 프랑코는 그의 정부를 그의 사후에도 지속시키기 위한 대책으로 1947년에 공식적인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스페인의 국체를 군주제로 규정하고 프랑코의 권력을 일종의 종신 섭정으로 확정하게 했다. 1967년에 그는 적은 인원의 소수파 의원을 국회에 진출시키는 직접선거를 실시했으며, 1969년에는 스페인 왕위의 계승권 주장자의 맏아들로 당시 32세이던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그의 사후에 권력을 계승할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다. 프랑코는 1973년에 총리직을 사임했지만 국가원수와 군통수권자 및 '운동' 본부장의 지위는 계속 보유했다. 프랑코는 대중적인 통치자로 행세한 적이 전혀 없으며, 대중의 지지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일도 드물었으나 1947년 이후 그의 통치에 대한 직접적 또는 조직적인 반대가 거의 없었다. 그의 정부가 개방되고 경찰의 단속이 완화된데다가 1960년대에 국가경제가 성장되자 프랑코의 이미지는 엄격한 총통으로부터 보다 온후한 민정의 원로 정치인으로 바뀌었다. 만년에는 6명의 손자와 시간을 보내면서 자주 사냥과 낚시 여행을 다녔다. 1960년대말에 이르러 프랑코는 건강이 현저하게 약화되었지만, 나이가 들어도 그의 자신감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번영과 현대화가 가속되는 분위기 속에서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그의 정부를 조국에 물려주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 엠파스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글을 편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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