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Jean-Baptiste Poquelin. 1622. 1. 15 프랑스 파리에서 세례받음~1673. 2. 17 파리. 프랑스의 위대한 희극작가·배우
[ Moliere, 포클랭 ]
초기의 연극 활동
몰리에르는 파리 중심부에서 태어났으며(또한 그곳에서 죽었음) 등기부 기록에 의하면 1622년 1월 15일에 장 바티스트 포클랭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는 그가 10세 때 죽었고, 아버지는 왕실지정 가구상으로, 그에게 콜레주 드 클레르몽(이 학교는 훗날 볼테르를 비롯해 숱한 프랑스의 재사들을 키워낸 리세 루이 르 그랑의 전신임)에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왕실의 직책을 맡게 되기를 희망했으나 1643년 그 자리를 사임한 것으로 보아 그는 전통과 결별하고 무대 위에서 살아갈 방도를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에 몰리에르는 다른 9명과 함께 일뤼스트르 테아트르(Illustre-Théâtre)라는 이름으로 극단을 조직하여 희극을 창작하고 공연했다. 몰리에르라는 그의 예명은 1644년 6월 28일자로 된 문서에서 처음 발견된다. 그는 이후 30년 동안 연극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51세의 나이로 기진하여 죽었다.
재능있는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는 몰리에르를 설득해 극장을 세우게 했으나, 새로 생긴 극단을 유지시키지는 못했다. 1645년 몰리에르는 건물과 집기 때문에 빚을 져 2번이나 투옥되었다. 17세기의 파리는 연극 관람객의 수가 매우 적었고, 시에는 이미 2개의 극장이 있었으므로 새로운 극단이 살아남기란 거의 불가능했으리라고 보인다. 1645년말부터 13년 남짓한 기간 동안 극단은 지방순회공연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했다. 이 기간에 대해서는 지방의 행정기록과 교회 기록들을 통해 극단이 여러 곳에서 공연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1648년에는 낭트에, 1649년에는 툴루즈에, 1652년말부터 1655년 여름까지 그리고 1657년에는 가끔씩 리옹에 있었고, 1654년과 1655년에는 몽펠리에에, 1656년에는 베지에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극단은 분명 부침을 겪었을 것이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이 기간은 몰리에르의 경력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시기로, 이 시절에 그는 배우이자 감독으로서 엄격한 훈련을 쌓는 동시에 작가들, 동료들, 관중 및 당국을 상대하는 법도 배웠을 것이다. 마침내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가 거둔 급속한 성공이나 반대에 부딪쳤을 때의 강인함은 이 시절의 훈련에서 비롯된 듯하다. 1655년 리옹에서 공연된 〈실수쟁이 L'Étourdi ou les contretemps〉와 1656년 베지에에서 공연된 〈사랑 싸움 Le Dépit amoureux〉은 그의 이름으로 알려진 최초의 작품들이다.
몰리에르에게 명성의 길이 열린 것은 그의 극단이 1658년 10월 24일 루브르 궁의 위병소에 차려진 가설무대에서 루이 14세를 위해 공연했던 코르네유의 〈니코메드 Nicomède〉와, 뒤이어 시골 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던 작은 여흥들 가운데 하나를 공연했을 때였다. 그 작품이 〈사랑에 빠진 의사 Le Docteur amoureux〉인데, 현재 남아 있는 것과 같은 형태였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이 작품은 성공적이었고 왕제(王弟) 오를레앙 공(公) 필리프의 호의를 얻게 해주었다. 공의 후원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7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후에는 왕 자신이 극단을 인수하여 '왕실 극단'(Troupe du roi)으로 만들었다. 극단이 다소간의 명성과 권위, 권문세가들로부터의 초대, 배우들의 후원금(종종 지불되지 않기도 했음) 등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이상의 소득은 별로 없었다.
1658년 파리에 돌아온 이후 몰리에르의 생애와 관련된 믿을 만한 사실들은 모두 작가·배우·감독으로서의 활동에 관한 것이다. 몇몇 프랑스 전기작가들이 그의 작품에서 개인사를 읽어내려 했으나, 그러한 시도들은 있을 수 있는 일을 실제 있었던 일로 오도할 위험을 지니고 있다. 전설 같은 이야기와 풍자를 제외하면 정보란 거의 없다. 몽테뉴, 플루타르크, 율리우스 카이사르, 세네카 등의 저서가 그의 서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의 희곡을 읽을 때 그런 작가들을 염두에 두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분명 위대한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몰리에르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작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문학이라 불릴 만한 것, 출판하기 위한 것은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희곡 외에 쓴 것이라고는 몇 편의 시와 고대 작가 루크레티우스의 미완성 번역이 전부임). 그의 희곡들은 모두 공연용으로 만들어졌으며, 그는 초기작 서문에서 표절을 피하기 위해 출판이라도 해야겠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그의 작품 2편은 실제로 표절되었음). 그는 7편의 작품을 미간(未刊)으로 남겼고, 전집이라고는 낸 적이 없으며(적어도 알려진 바로는) 작품의 출판을 위해 교정쇄를 읽은 적조차도 없다. 그에게 희극이란 공연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었다. 19세기는 이러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의 극적인 천재성을 제대로 발견한 것은 루이 주베, 샤를 뒬랭, 장 루이 바로, 장 빌라르 등 20세기의 배우들이었다.
그는 고전작가도, 자기 뜻대로 계획하고 글을 쓸 여가를 가진 작가도 아니었다. 경쟁·생존을 위한 투쟁이야말로 몰리에르의 전 생애에서 주조(主調)였으며, 자신의 배우와 관객을 유지한다는 것은 다른 극단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의미했다. 그는 이런 싸움을 거의 혼자 힘으로 해냈다. 그의 극단이 유지된 것은 그의 기술적 역량과 인품 덕택이었다.
몰리에르가 파리에서 공연한 첫 희곡 〈재치를 뽐내는 여인들 Les Précieuses ridicules〉은 그의 이후 작품들을 예고해준다. 그것은 2명의 시골 아가씨가 주인 행세를 하는 2명의 하인에 의해 웃음거리가 된다는 이야기로, 한편으로는 아가씨들의 고상함에 대한 열망과 상식의 결여를, 다른 한편으로는 하인들의 평이한 언어와 아가씨들의 교양적 상투어를 대비시키고 있다. 아가씨들이 고도의 재치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언동들은 물질적인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뒤틀린 교양관을 반영한다. 이 잰 체하는 인물들이 제공하는 웃음거리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신선한 감동을 주며 당시의 관객들에게는 한층 더 그러했을 것이다. 아마도 〈재치를 뽐내는 여인들〉은 〈스가나렐 Sganarelle〉과 마찬가지로 루브르에 인접한 프티 부르봉(Petit Bourbon)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것이다. 프티 부르봉은(아무런 통지없이) 헐렸고, 극단은 1661년초 리슐리외가 팔레루아얄(Palais-Royal)에 세운 극장으로 이전했다. 몰리에르의 '파리'극들은 모두 이곳에서 공연되었다. 그 첫작품이 1661년 2월에 공연된 〈나바르의 돔 가르시 Dom Garcie de Navarre, ou le prince jaloux〉인데, 허점투성이인 이 영웅 희극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 단지의의가 있다면 몰리에르를 분발시켜 〈인간혐오자〉를 쓰게 했다는 점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실패는 드물었고 파리 극장에서의 유례없는 대성공들에 의해 가려졌다.
추문과 성공
몰리에르 석고상
1662년 12월 26일 초연된 〈아내들의 학교〉는, 마치 사람들이 그 무엇도 신성불가침으로 생각지 않는 희극의 천재가 나타났음을 알아차리기도 한듯 추문을 불러일으켰다. 몇몇 훌륭한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몰리에르의 걸작이요, 가장 순수한 희극이라고 평했다. 폴 스카롱이 옮긴 스페인 이야기 〈무익한 경계 La Précaution inutile〉(1655)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현학자 아르놀프가 주인공인데, 그는 여성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세간의 풍습을 전혀 알지 못하는 소녀와 결혼하기로 한다. 이 소녀의 깨어나기 시작하는 감수성, 관습의 속박이 없기 때문에 한층 강한 감수성의 섬세한 묘사는 이 희극의 경이로운 점이다. 극은 현학자가 소녀와 사랑에 빠지는 대목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소녀의 말을 더듬어 이해해야 하는 수고는 그가 받는 벌인 동시에 관중에게는 즐거움이었다. 1662년 이후로 그의 극단은 팔레루아얄의 극장을 이탈리아 배우들과 함께 사용했으며, 각 극단이 매주 3번씩 공연했다. 한편 몰리에르는 개인적으로 주문을 받은 희곡들도 썼는데, 이 작품들은 다른 곳에서 초연되었다. 1661년 8월 보에서 공연된 〈불쾌한 사람들 Les Fcheux〉, 1664년 베르사유에서 공연된 첫번째 〈타르튀프〉, 1670년 샹보르에서 공연된 〈부르주아 장티욤 Bourgeois Gentilhomme〉, 1671년 튈르리 궁에서 공연된 〈프시케 Psyché〉 등이 그것이다.
1662년 2월 몰리에르는 아르망드 베자르와 결혼했다. 기록에 남아 있는 대로 그녀가 마들렌의 누이였는지, 아니면 몇몇 동시대인들이 시사하듯 그녀의 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결혼에서 세 자녀가 태어났는데, 딸 하나만이 살아 남았다. 믿을 만한 정보는 못 되나 몰리에르에 대해 적대적인 팜플렛에 아르망드의 연애사건이 실리기도 하는 등 그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몰리에르는 무대를 통해 비평가들에게 답변함으로써 〈아내들의 학교〉가 일으킨 반대를 오히려 극단의 신용을 얻는 방향으로 돌렸다. 1663년 6월에 공연된 〈아내들의 학교에 대한 비판 La Critique de L'Ecole des femmes〉과 10월에 공연된 〈베르사유 즉흥극 L'Impromptu de Versailles〉은 모두 단막 토론극이다. 〈아내들의 학교에 대한 비판〉에서는 자신의 희극이 지닌 새로운 스타일의 몇 가지 원칙을 표명했고, 〈베르사유 즉흥곡〉에서는 극단의 배우분장실과 연습에 포함된 뒷얘기들을 놀랄 만큼 사실적으로 그린 연극사를 제시하고 있다. 1664년 5월 첫번째 〈타르튀프〉의 공연이 일으킨 격랑과 추문은 〈아내들의 학교〉가 일으킨 분쟁보다 휠씬 심한 것이었다. 이 위대한 작품의 역사는 몰리에르가 활동하던 당시의 여건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인내와 투지력을 입증해준다. 그는 보상을 받기까지 5년이나 기다려야 했고 극단 배우들은 생계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겼고, 그것은 그의 생애 최대의 성공이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진작에 싸움을 포기했을 것이었다. 오늘날 알려진 〈타르튀프〉의 처음 3막에 해당했을 〈타르튀프〉가 초연되었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연 금지령을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몰리에르는 〈동 쥐앙 Don Juan, ou le festin de Pierre〉을 무대에 올려 사태를 한층 악화시켰다. 그 볼만한 결말에서 무신론자는 지옥에 떨어지지만, 그것은 그가 실컷 즐기고 관중을 분개시킨 다음이었다. 〈동 쥐앙〉은 급한 재정적 필요에서 만들어졌으나, 값비싼 실패로 끝났다. 15회 공연된 뒤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단되었지만 몰리에르는 그것을 공연하거나 출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 쥐앙〉은 그의 예술의 둘도 없는 본보기였다. 주인공 동 쥐앙은 극단적 귀족주의 원칙을 고수하여 부모나 의사, 상인이나 신에 대한 온갖 종류의 의무들을 거부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에 대한 의무들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순박하고 겁많고 미신적인 하인 스가나렐은 모든 면에서 그와는 반대이다. 이 두 인물은 돈 키호테와 산초에 대응하는 프랑스적 전형들이다.
당국과의 싸움에 휘말린 와중에서도 몰리에르는 극단을 혼자 힘으로 이끌어나갔다. 배우도 작가도 확보할 수 없었던 그는 더 많은 작품을 씀으로써 작가의 부족을 메워나갔다. 1664년 그는 장 라신의 첫 희곡 〈라 테바이드 La Thébaïde〉를 무대에 올렸으나, 다음해에 라신은 자신의 2번째 희곡 〈알렉산더 대왕 Alexandre le Grand〉을 몰리에르의 배우들이 공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오랜 전통을 지닌 다른 극장에 넘겼다. 몰리에르는 당국으로부터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했다. 이러한 장애들은 몰리에르에 대한 왕의 호의로 인해 어느 정도 완화되었을지 모르나, 왕의 호의란 변덕스러운 것이었다. 약속된 연금은 지불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궁정에서는 위대한 작품보다도 경쾌한 극을 원했다. 그의 극단의 수입은 불확실하고 유동적이었다. 파리에서 보낸 14년 동안 몰리에르는 무대에 올린 95편의 희곡 중 31편을 썼다. 자신의 질병, 대왕대비의 승하에 따른 7주간의 극장 폐쇄, 〈타르튀프〉 및 〈동 쥐앙〉의 공연금지 등 잇단 불운을 타개하기 위해 그는 한 시즌(1666~67)에 5편의 희곡을 쓰기도 했다. 이 5편 중에서 〈억지 의사 Le Médecin malgré lui〉만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는 〈인간혐오자〉가 거의 처음부터 식견있는 관객들로부터 걸작으로 평가되었다. 이 작품은 별다른 출전없이 몰리에르 극단의 자체적 요소들로부터 만들어진 응접실 희극이다. 몰리에르는 몸소 알세스트 역을 맡았는데, 이 인물은 새로운 종류의 바보로서 고매한 원칙들과 엄격한 표준을 지녔으나 천성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자이다. 알세스트는 클리멘(몰리에르의 아내 아르망드가 연기했음)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녀는 탁월한 희극적 인물로서 어떤 경우에도 막힘이 없는 사교계의 총아이다. 극의 구조는 시적이리만큼 단순하다. 알세스트는 우울한 얼굴로 극 전체를 휩쓸고 다니며, 어떤 '정직한' 사람도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 또한 타르튀프만큼이나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에서 티끌을 찾기에만 열심이다.
교회는 몰리에르에 대한 싸움에서 거의 승리함으로써, 〈타르튀프〉를 5년간, 〈동 쥐앙〉을 평생동안 공연금지시켰다. 5막짜리 〈타르튀프〉는 1667년에 단 1번 공연되었으나 경찰총장에 의해 금지되었고, 대주교는 그것을 다시 공연하면 파문하겠다고까지 위협했다. 이에 대해 몰리에르는 다시금 왕을(심지어 전쟁터에서도) 설득하는 한편, 〈사기꾼의 희극에 대한 서한 Lettre sur la comédie de l'Imposteur〉을 발표해 자신의 극을 옹호했다. 1668년 한 해 동안 그는 〈앙피트리옹 Amphitryon〉(1. 13)·〈조르주 당댕 George Dandin〉(7. 18 베르사유)·〈수전노 L'Avare〉(9. 9) 등을 공연해 극단을 결속시켰다. 몰리에르처럼 독창적인 희극작가는 어느덧 고대의 희극적 인물인 구두쇠의 근대적 묘사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의 1668년 희극들 중 마지막 작품인 〈수전노〉는 운문처럼 읽히는 산문인데, 상투적인 상황들이 모두 재연되나, 그 정신은 몰리에르의 다른 희극들과 달랐으며 모든 사람의 기호에 맞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창조한 구두쇠는 살아 있는 역설로서, 돈에 대한 숭배에서는 비인간적이지만 존경과 애정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는 극히 인간적이다. 그의 광기는 잔인성과 병적인 고독, 심지어는 정신이상까지 시사하는 것으로, 이 희극은 희극에서 웃음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삭막하다. 그래서 괴테는 그것을 차라리 비극적이라고도 했으나, 이전 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과 의지의 힘은 비인간적인 목표들에 봉사하며 본능 및 극히 '인간적인' 본성에 반대된다.
희극적 요소의 기초가 되는 것은 명랑함보다는 이러한 부조리와 부조화이다. 흔히 소극(笑劇)으로 불리는 1668년의 2번째 희극 〈조르주 당댕〉은 몰리에르가 만든 가장 위대한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그 주인공인 바보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면서도 지혜가 그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일 사태가 정말로 나쁘게만 돌아간다면 현명해봐야 소용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자신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그는 결코 증명할 수 없다. 이 희극의 주제는 사소한 듯하나 무한한 암시력을 갖는 것으로, 전혀 새로운 범주의 희극을 제시한다.
1669년에는 웬일인지 공연허가가 얻어졌고 〈타르튀프〉의 장기공연이 시작되어 그해에만도 60회 이상 공연되었다.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몰리에르를 곤경에 빠뜨렸던 이 희곡의 주제는 한 지방의 위선자가 그의 여주인을 유혹하는 것을 보고 얻은 듯하다. 작품의 3가지 형태 중에 마지막 것만이 전해진다. 1664년 왕 앞에서 공연되었던 첫번째 〈타르튀프〉는 3막으로 구성되었는데, 부르주아 가정에 들어간 철저한 사기꾼에게 주인이 자기 딸을 주고 자신의 아들에게서 상속권을 빼앗는다는 이야기이다. 당시에는 세속의 신앙지도자들이 가정에 자리잡고 생활을 훈계 지도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이 '성스러운' 인물은 고용주의 아내와 정사를 벌이다가 발각되자, 거창한 자기비난으로 위신을 회복하고 주인을 설득해 자기를 용서하게 할 뿐 아니라 가능한 한 자주 아내를 돌볼 수 있게 만든다. 몰리에르는 이 주제에서 훨씬 더 큰 희극적 가능성들을 엿보았던 듯 5막으로 확대했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5막짜리 〈타르튀프〉는 2개의 유혹 장면을 포함하며 타르튀프 자신의 희극적 역설(비인간적이리만큼 금욕적인 체하면서 실제로는 극히 인간적인 난봉꾼이라는)로 흥미를 옮기고 있다. 신심 깊은 자들의 마음을 거스르기에는 이보다 더 적합한 주제도 없을 것이다. 〈아내들의 학교〉의 아르놀프처럼, 타르튀프도 재치만을 믿고 본능을 잊었기 때문에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후기 희곡들
몰리에르는 〈타르튀프〉 분쟁으로 지친 나머지 반복되는 질병을 이기고 새 희곡들을 써낼 힘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상 그는 이후 4년밖에 더 살지 못했다. 그러나 1669년에는 샹보르에서 왕을 위해 〈푸르소냐크 씨 Monsieur de Pourceaugnac〉를, 1670년에는 〈부르주아 장티욤〉을 공연했다. 〈부르주아 장티욤〉은 부르주아, 즉 중·상류층의 사회적 상승이라는 당대의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 그의 모든 희극들 중 가장 근대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주르댕은 불유쾌한 아첨꾼이라기보다는 어리석지만 즐겁고 순진하며 성실한 인물이다. 그의 어리석음은 그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인정많은 기질 속에 들어 있다. 이것은 몰리에르의 가장 행복한 형태의 희극이다. 남자 주인의 어리석음은 아내와 하인의 상식으로 상쇄된다.
병석에서도 창작을 계속했던 몰리에르는 1671년 〈프시케〉와 〈스카팽의 간계 Les Fourberies de Scapin〉를 썼다. 뒤이어 1672년에는 〈유식한 여자들 Les Femmes savantes〉이 나왔는데, 이런 주제는 자칫 지적인 여성들에 대한 풍자가 되기 쉽지만(어떤 이들은 몰리에르의 작품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했음) 몰리에르는 자기 주장이 강하고 유식한 아내를 은근히 두려워하는, 분별있는 부르주아를 묘사한 것이다. 〈기분으로 앓는 사나이 Le Malade imaginaire〉는 죽음과 의사를 두려워하는 우울증 환자에 대한 것으로, 몰리에르의 마지막 희극이다. 그것은 의학적 전문용어들과 직업주의의 자세한 묘사, 지식은 있으되 양식(良識)은 전혀없는 사이비 의사의 우둔함, 그리고 다른 인물들의 미신과 탐욕과 야바위에 대항하는 젊고 분별있는 연인들의 온건함 등이 어우러져 강한 효과를 자아내는 희극이다. 1673년 2월 17일 이 희곡의 4번째 상연 도중에 몰리에르는 무대 위에서 쓰러졌고 리슐리외가에 있는 집으로 실려갔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성사를 통해 배우라는 직업을 형식적으로나마 포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2월 21일 해가 진 뒤에 예식없이 매장되었다.
배우·극작가로서의 몰리에르
몰리에르의 연기는 실망과 동시에 영광의 원천이었다. 그는 비극 배우가 되기를 원했으나 당대의 취향은 그와 반대되는 것으로, 관중은 성내고 기뻐하는 위풍당당한 비극적 문체를 선호했다. 몰리에르는 체격과 유연성, 풍부한 얼굴 표정을 지닌 타고난 희극배우였다. 무대를 떠나서는 그리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고 명랑하지도 않았으나, 실생활 그대로의 말씨를 모방하고 구사할 줄 알았으며 배우의 지치지 않는 원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사소한 사건으로도 희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줄 알았으며 자신을 무대에 올려놓을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한 인물에게는 자신의 기침을, 다른 인물에게는 자신의 기분을 부여했으며, 실제 연습을 통해 작품을 만들었다. 그가 창조해낸 위대한 희곡 속의 인물은 실제 그의 극단 멤버들과도 같다. 그가 실제로 병들어 있었을 때 병자 역을 연기하다가 죽었다는 것은 그에게 걸맞은 일이었다.
그의 연기는 창작에도 영향을 미쳐, 그는 자신이 아주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는 것만을 썼다. 그는 성마른 역할, 하인 역할, 오쟁이진 남편 역할, 어리석은 부르주아 역할, '몰리에르 녀석'을 저주하는 미신적인 노인 역할(찰리 채플린과의 비교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음) 등을 맡았다. 그에게는 동물적인 에너지나 모방에 대한 재능 이상의 무엇, 극적 비전의 강렬함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자질이 있었다. 이 점에서도 배우들은 학자들이 간과했던 그의 천재적 양상, 즉 무대 위에서의 격렬함을 재발견했다. 그의 희곡들을 이성에 대한 옹호론으로 본다면 그 생생함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의 이성은 그로 하여금 부조리한 것에 생기를 부여했다. 그의 인물들은 쉽게 흥분할 뿐만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을 정도로 흥분한다. 그는 극의 생생함과 생명감을 위해 플롯을 희생하며, 고전 작가이기는 하지만 창작의 엄격한 규칙들을 쉽사리 저버린다.
몰리에르가 이성의 냉정한 수호자이며 자신의 극에 등장하는 보다 이성적인 인물들과 관점을 같이 한다는 주장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으나,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환경을 감안한다면 믿기 어렵다. 당시만 해도 희극이란 설교가 아니며, 희극에서 어떤 교훈이 얻어질 수 있다 해도 부차적 효과일 뿐 교훈주의와는 정반대된다고 생각했다. 생각들이 표현되는 것은 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이지, 작가의 견해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만일 그에게 위선이나 무신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그런 질문에 놀라면서 극장은 '견해'를 제시하는 곳이 아니라고 답변을 회피했을 것이다. 몰리에르가 결혼이나 교회, 지옥, 계급 간의 격차 등에 대해 자기 의견을 표명하려 했다는 증거자료는 전혀 없으며, 엄격히 말해 이런 문제들에 대한 그의 견해는 알 수 없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그가 극장 안에서 극을 위해 일했고 놀라운 극적 환기력으로 그 어떤 상상적 장면에도 생기를 부여했다는 사실뿐이다. 만일 그가 무신론자에 대해 동정적인 초상을 남겼다면 그것은 자유사상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촌스러운 하인도 생생하고 동정적으로 그렸다. 그의 희곡들이 사물을 증명하고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은 그의 작품을, 작품이 지닌 환상과 상상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몰리에르의 작품이 갖는 힘은 그 언어의 창조적 활기에 있으므로, 그의 작품들을 풍속희극·인물희극·소극으로 나누는 전통적 분류는 별 소용이 없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특정한 종류의 희곡을 쓰려는 의도를 가지고 출발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강제 결혼 Le Mariage forc〉에서는 라블레의 인물 파뉘르주가 표명하는 결혼에 대한 회의로부터, 그리고 〈억지 의사〉에서는 매를 맞지 않으려고 의사인 척하는 나무꾼에 대한 중세의 우화로부터 시작한다. 그러한 대강의 골격을 기초로 하여 생동하는 인물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그 인물이 전혀 다른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처음 표현된 역할들이 역전되는 토론의 장을 마련한다. 극의 매력은 실제 일어나는 일보다는 지적인 리듬에, 이야기보다는 토론에 있으므로, 플롯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본질을 전달하지 못한다.
독창적 희극관
몰리에르에 대한 공격들은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명백한 미학적 진실들을 표명할 기회를 그에게 제공했다. 가령 〈아내들의 학교에 대한 비판〉에서는 비극은 영웅적일 수도 있지만 희극은 자연에 거울을 들이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려진 인물들이 살아 있는 전형들로 보이지 않는다면 희극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점잖은 사람들을 웃긴다는 것은 이상한 노릇이다." 그리고 혹자들이 작가들에게 부과하려 애쓰는 규칙들에 대해서는 "나는 기쁨을 주는 것이야말로 황금률이며, 성공하는 극은 올바른 방식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술철학,유머).
〈아내들의 학교〉에 대한 공격들은 〈타르튀프〉나 〈동 쥐앙〉이 일으킨 폭풍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들에 대한 공격은 시인으로부터 예술적 원칙에 관한 값진 진술들을 끌어냈다. 〈동 쥐앙〉은 공식적으로 비난된 적이 없으므로 그것에 대한 공개 답변도 없다. 〈타르튀프〉를 옹호하는 자료들로는 왕에 대한 2편의 상소문, 1669년의 초판본에 실린 서문(이것들은 모두 몰리에르의 자비로 발간되었음)과 1667년의 〈사기꾼의 희극에 대한 서한〉이 있다. 상소문들과 서문이 미학적으로 실망스러운 것은 몰리에르가 그의 적대자들이 선택한 쟁점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희극도 교훈적이어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기(몰리에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다른 증거는 없으므로, 그가 그런 식으로 논한 것은 강요되었을 때뿐이라고 할 수 있음) 때문이다. 〈사기꾼의 희곡에 대한 서한〉은 훨씬 더 중요한 자료로서, 의미심장한 몇 줄 속에 〈타르튀프〉뿐만 아니라 몰리에르의 새로운 희극 개념의 미학적 기초를 표명하고 있다.
"희극적인 것이란 자연의 혜택이, 우리가 그것을 보고 피할 수 있도록, 모든 비이성적인 것에 부여한 외적이고 가시적인 형태이다. 희극적인 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이성적인 것을 알아야 하는 바, 희극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의 부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부조화야말로 희극적인 것의 핵심이다. 따라서 모든 거짓말, 위장, 속임수, 가장, 사실이 아닌 모든 외적인 현시, 단일한 근원에서 나오는 행동들간의 모든 모순, 이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희극적이다."
여기에서 몰리에르는 희극적인 것에 대해 자신의 개념이 갖는 새로운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희극이란 현명한 것과 어리석은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 생겨나는 항구적인 이중성에 기초하며, 우스움이란 우발적 효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희극관이야말로 그의 창안이고 그의 영예이다.
몰리에르의 주요한 기술적 양태는 여러 층위 내지는 문맥을 뒤섞는 것이다. 인물들은 한 가지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잊어버린 듯 엉뚱한 때에 나서며 역할을 과장되게 연기한다. 그래서 이러한 부수적 전개에 주의하는 사람은 뒤섞인 층위들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된다. 〈억지 의사〉에서 사람을 두드려패 의사인 척하게 만든다는 발상은 그리 세련되지 못한 것이지만, 몰리에르는 이러한 발상을 가지고 놀듯 나무꾼으로 하여금 새로운 역할을 즐기고 전문용어들을 주워섬기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가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든다. 그는 히포크라테스에 대해 공허한 말을 지껄이고, 라틴어를 모르는 환자를 만나자 말뜻에 신경쓸 필요가 없으므로 기뻐한다. 오른쪽에서 심장을 찾다가 실수를 들킨 그는 저 유명한 대사로 태연자약하게 대꾸한다. "우리가 그걸 다 바꿔놓았다오." 돈을 강탈당한 구두쇠는 비감하지만 그가 내뱉는 부조리한 언어는 비감하기는커녕 웃음을 자아낸다. "……다 끝났다……나는 죽는다……나는 죽었다 ……나는 묻혔다." 그는 그렇듯 불합리하고 과장된 어조로 정의를 요구하며 법정들을 고발하겠다고 위협한다. 몰리에르의 〈인간혐오자〉는 이상으로서의 정의와 사회제도로서의 정의가 어떻게 뒤섞이는가를 잘 보여준다. "나는 정의를 내 곁에 두었는데도 재판에서 졌다!" 자신에게는 세계질서의 수치라고 생각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의 머리가 돌았다는 증거일 뿐이다. 몰리에르의 극적 언어는 그러한 간결성을 얻고 있다.
프랑스적 천재
볼테르가 몰리에르를 "프랑스의 화가"라고 한 것은 그의 희극들이 그리고 있는 프랑스적 태도의 범위를 시사해준다. 그때문에 프랑스인들은 그를 특별한 의미에서 자신들의 작가라고 생각하며 그에 대해 각별한 흥미를 가져왔다. 그들은 외국인들이 간과하기 쉬운 몰리에르 작품의 양상들을 강조하는데, 그중에서 3가지가 주목할 만하다.
첫째, 그의 작품들은 고도의 형식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결코 사실주의(있는 그대로의 삶)만을 제시하지 않으며, 거기에 항상 빛과 운동, 음악과 춤과 언어를 융합하는 양태와 형식을 부여한다. 그의 극에서 막간극을 생략하는 현대 제작들은 본래의 효과를 상실한 것이다. 인물들의 이합집산, 장면과 대사들의 배열, 희극적인 대화들도 사실주의를 무시하고 이루어진다.
둘째, 외국인들이 심리학을 보는 곳에서 프랑스인들은 시를 본다. 그들은 그의 희곡들을 사회적 광기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사상들을 잠깐 스쳐 요점을 만들어내는 환상의 양태라고 본다. 〈인간혐오자〉는 사례연구나 프랑스적 '햄릿'이 아니라 교묘하게 어우러진 목소리들과 태도들의 합창으로서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을 싣는다. 그의 희곡은 그 중심주제를 끊임없이 환기함으로써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사람이 자기 마음을 말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여서, 이상주의적이거나 중상모략적이거나 거칠거나 원한에 차 있거나 또는 단순히 어리석다. 프랑스인들이 보기에 몰리에르의 뛰어난 점은 사회 내에서 자기중심성이라는 신비를 희롱하는 이러한 환상에 있다.
셋째, 프랑스에서 높이 평가되는 몰리에르의 자질은 인간의 여러 측면을 보편적 인간으로부터 구별해내는 그의 지적인 예리함이다. 몰리에르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16세기의 수필가 몽테뉴는 지식이나 예의, 기술처럼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자질들과, 인간성·동물성처럼 다른 수식 없이 '인간 본성'이라 할 만한 것을 구별한 바 있다. 몰리에르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을 대비하기를 즐겼는데, 그의 극에서는 종종 사회적 표피가 벗겨져나가고 진짜 인간이 나타나며 극 중의 많은 대화들은 예의바르게 시작하여 공공연한 모욕으로 끝나기도 한다.
몰리에르는 여러 가지 형태로 자연과 재치를 대립시켰다. 그의 희극들은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그 너머의 것까지도 포함하며, "그건 상식에 어긋나는데요, 하지만 어떻든 사실은 사실이지요"라고 〈앙피트리온〉에서 매맞은 하인이 말하듯이 이성과 사실이 양립하는 적은 별로 없다.
W. G. Moore 글 엠파스백과사전 발췌
타르튀프 [Le Tartuffe]
타르튀프는 프랑스어에서 위선자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될 정도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몰리에르의 전성기의 작품인데 희극으로 분류된다. 1664년, 베르사유 궁전의 축제에서 <사기꾼>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보수적-종교적 세력의 압력에 의해 루이 14세는 이 극을 금지시킨다. (당시 교회의 고위 교직자들의 부패 ·타락한 생활을 폭로한 대담한 희극이었기 때문) 1667년, 몰리에르는 이 극을 다른 이름으로 팔레-르와얄에서 공연하였지만, 첫 공연 이후 다시 금지되고 만다. 이제 파리의 대주교는 이 극을 읽기만 하는 자도 파문하겠다고 협박했다. 1669년의 개작본에서야 비로소 왕의 공연허가가 주어졌고, 그 후 커다란 성공을 하게 된다. 초판에서는 따르뛰프가 성직자였지만, 개작본에서는 몰락한 귀족으로 바뀌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양심의 감독자directeur de conscience“라는, 신앙과 생활방식에 대한 조언자들이 높은 존경을 받으며 활동하고 있었는데, 몰리에르는 바로 이런 자들을 풍자하고 있다. 경건함의 명목 하에 일어나는 기만적인 행위들을 탄핵하고 있는 것이다. 따르뛰프는 예수회의 행동지침론Kauikstik이나 신비적 신학에 능통한 자로서,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좇아 충실한 가장이었던 오르공에게 영향을 미쳐 그의 재산을 빼앗고 그의 딸과 결혼하려 하고, 심지어 그의 아내에게 접근하기까지 한다. 오르공의 아내가 결국 계책을 써서 오르공이 숨어있는 장소에서 따르뛰프로 하여금 자신에게 육체적으로 접근하게 함으로써 오르공은 눈을 뜨게 되지만, 이미 그의 재산은 따르뛰프에게 넘어간 상태다. 거의 시민비극으로 끝날 뻔한 무대의 사건은 왕의 개입을 통해 따르뛰프의 정체가 폭로됨으로써 해피 엔드로 끝난다. 여기서 왕은 Deux ex machina의 기능을 하는 것인데, 이런 결말은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이 극에서 오르공의 처남인 끌레앙뜨는 이성종교의 이상을 체현하고 있다. 집중된 줄거리와 인물묘사, 운문의 기술 등의 면에서 이 작품은 몰리에르 예술의 정점을 이룬다고 평가되고 있다. 3막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따르뛰프의 성격은 등장하자마자 하는 몇마디의 말을 통해 이미 탁월하게 묘사된다. 다른 인물들의 묘사도 생동감이 넘친다. 이런 장점들은 이 극이 오늘날까지 자주 공연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타르튀프 [Le Tartuffe] 전문읽기
위선자 따르뛰프
/몰리에르 作, 정명호 譯
등장인물
빼르넬로 부인 오르공의 어머니
오르공 엘미르의 남편
엘미르 오르공의 아내
다미스 오르공의 아들
마리안느 오르공의 딸. 발레르의 애인
발레르 마리안느의 애인
끌레앙뜨 엘미르의 오빠
따르뛰프 거짓 신사
도린느 마리안느의 몸종
드와이얄 집달리
프리뽀트 빼르넬리 부인의 하녀
하사관
제 1막
제 1장
빼르넬르 부인, 하녀 프리뽀트, 엘미르, 마리안느, 도린느, 다미스, 끌레앙뜨
[빼르넬르 부인] 자, 프리뽀트, 가자. 이런 자들과 함께 있을 순 없다.
[엘미르] 너무 걸음이 빠르셔서 쫓아갈 수가 없어요.
[빼르넬르 부인] 괜찮다, 얘야. 더 따라오지 않아도 돼. 그런 겉치레는 차리지 않아도 되니까.
[엘미르]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죠. 그런데 어머님, 왜 그렇게 빨리 가세요?
[빼르넬르 부인] 이 집안 꼬락서니를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 기분이 상해도 보통 상하는 게 아니야.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아 급히 가는 거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 조심성이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찾아 볼 수 없고, 저마다 제멋대로 떠들어대니, 원. 저마다 잘났다고 날뛰는 요지경 속이야.
[도린느] 그래도.....
[빼르넬르 부인] 넌 계집애가 지나치게 말이 많고 너무 건방져. 모든 일에 끼여들어 주둥이를 놀리려 든다니까.
[다미스] 하지만……
[빼르넬르 부인] 넌 말 그대로 등신이야. 할머니인 내가 말하는 거니 틀림없지. 난 네 아버지, 그러니까 내 아들에게 백 번도 더 말했다. 네가 못된 녀석이 되어서 애비 속을 썩힐 거라고.
[마리안느] 제 생각으로는……
[빼르넬르 부인] 그래, 넌 조심성있고 쓸데없이 나서거나 하지 않지. 온순하기 이를 데 없이 보이거든. 하지만 흐르지 않는 물처럼 더러운 물은 없다고들 하지 않니. 숨어서 뭘 꾸미는 게지? 내가 염증을 느끼는 건 바로 그거야.
[엘미르] 하지만 어머님……
[빼르넬르 부인] 이렇게 말해서 안됐지만, 얘야, 네 몸가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틀렸어. 네가 자식들한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할텐데, 죽은 며느리가 훨씬 나았어. 넌 돈을 물쓰듯 하고 공주처럼 차려 입고 있지만, 난 그런 게 마음에 안 들어. 네 남편 마음에 들려고 하는 짓이라면, 뭐 그렇게 단장할 것 없지 않니?
[끌레앙뜨] 하지만 부인, 그래도……
[빼르넬르 부인] 며느리의 오라버님이신 당신이야 존경하고 친밀감을 느끼고 숭배하는 바이지만, 그러나 만약 내가 아들이라면, 그러니까 이 며느리의 남편이라면 이 집에는 절대로 출입하지 않도록 간절히 부탁했을 거라오. 당신은 언제나 처세훈(處世訓)을 늘어놓지만 정직한 사람들이 따를 만한 게 전혀 못 되거든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말씀드린 것 같은데, 워낙 내 성미가 그래 놔서요.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는 털어놓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니까.
[다미스] 따르뛰프 선생께서는 아마 만족하실 거에요……
[빼르넬르 부인] 그 분은 훌륭한 분이지. 그 분 말이라면 따라야 해. 너 같은 미치광이가 그 분에게 시비를 거는 걸 보면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을 정도다.
[다미스] 뭐요! 그 트집쟁이 위선자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걸 참고 견디란 말입니까? 그 훌륭한 선생의 허가 없이는 기분을 풀거나 즐기지도 못한단 말입니까?
[도린느] 그 사람 교훈을 듣고 따르자면 죄를 범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요. 그 광적인 트집쟁이는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는 게 없으니까요.
[빼르넬르 부인] 그 분이 모든 것에 간섭하시는 건 잘하시는 처사야. 너희들을 천국의 길로 인도하려고 그러시는 거니까. 모두가 그 분을 따르도록 하는 것은 내 자식의 의무지.
[다미스] 아니요, 할머니. 아버지가 뭐라 하시든 또 누가 뭐라고 하든 저는 절대로 그런 작자를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건 제 마음을 거슬리는 게 됩니다. 그 자가 하는 수작은 번번이 제 비위를 거슬려요. 멀지 않아 한바탕 터지겠지만, 상대가 그 야비한 자이고 보면 크게 붙을걸요.
[도린느] 그렇구말구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이 집에서 주인 행세를 하다니, 비난받아 마땅하죠. 처음에 굴러들었을 때는 구두도 신지 않고 서푼짜리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던 주제에 제 분수도 잊어버리고 번번이 기분을 상하게 할 줄이야.
[빼르넬르 부인] 허! 기가 막혀서! 만사가 그 분의 경건한 분부대로만 된다면 훨씬 나아질 텐데.
[도린느] 할머니께서는 그 자를 성인군자로 착각하고 계시지만, 사실 그는 온통 위선 덩어리에요.
[빼르넬르 부인] 얘야, 그렇게 함부로 혀를 놀리지 마라!
[도린느] 그 자나, 그를 따라온 로랑이나 모두 확실한 보증인이라도 있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요.
[빼르넬르 부인] 그 하인에 대해서야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주인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건 내가 보증할 수 있다. 진실을 이야기하니까 너희들은 그 분을 원망하고 싫어하는 게야. 그 분이 화를 내는 것은 죄에 대해서야. 오로지 하늘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만 나서는 분이야.
[도린느] 네, 그렇지만 왜 이 집에 딴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싫어할까요? 얼마 전부터 더욱 심하더군요. 정직한 손님이 찾아온다고 해서 하나남의 기분이 상할 리도 없는데 뭐 그렇게 요란스럽게 수선을 떨 필요 있어요? 우리끼리니까 말씀이지만 그 까닭을 말해 볼까요? (엘미르를 가르키며) 아마도 부인에게 질투를 하는 것 같아요.
[빼르넬르 부인] 입 닥쳐.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야. 방문객에 대해서 짜증을 내는 것은 그 분 만이 아니다. 너희들이 사귀는 사람들의 법석대는 소리, 현관 앞에는 노상 마차들이 늘어서서 웅성대고 하인들이 떼를 지어 모여서 떠들어대니 이웃에 나쁜 평판이 도는 게 당연하지. 실제로 별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말이 나는 것은 좋지 않아.
[끌레앙뜨] 지껄이는 입을 굳이 틀어막을 필요가 있을까요? 쓸데없는 소문이 퍼진다고 해서 친한 친구와 사귈 수도 없다면 그게 말이나 됩니까? 또 가령 그렇게 결심을 한다 해도 온 세상 사람들의 입을 봉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악담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쑥덕공론이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보내는 수밖에…… 스스로 깨끗하고 맑게 살도록 노력하고 수다쟁이들에게는 제멋대로 지껄이도록 내버려 두어야죠.
[도린느] 우리들 흉을 보는 건 이웃 집 다프네하고 그 꼬마 남편 아니에요? 가장 웃음거리가 되는 행동을 하는 인간들이 언제나 남을 헐 뜯는 데는 앞장서니까요. 사랑의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밖으로 드러날치라면 재빠르게 그것을 눈치채서는 소문을 퍼뜨리는 데 기쁨을 느끼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 꾸며대거든요. 타인의 행동을 그들이 원하는 빛깔로 물들이면 그들 자신의 행동이 사회에서 용납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죠. 자신의 권모술수를 순진무구한 것으로 가장해서 자신들에게 퍼부어지는 비난을 딴 곳으로 돌리려는 헛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거에요.
[빼르넬르 부인] 억지 얘기 아무리 늘어놔 봐야 소용없어. 오랑트 씨는 언제나 하나님을 섬기는 데 마음을 쓰고 모범적인 생활을 한다는 건 누구나 알지 않니? 그 오랑트 부인이 이 집에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드는 걸 비난한다는 거야.
[도린느] 훌륭한 모범이군요. 그 여자는 선량한 부인이에요! 행실이 바르다는 건 사실이지만요, 그 열렬한 신앙도 나이를 먹은 덕택일 뿐이지 채신을 지키기 위해 마지못해 정숙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어요. 사내들의 인기를 끌던 시절에는 한껏 재미를 보지 않았던가요? 그러나 그녀의 두 눈에서 점차 광채가 사라져 가고 사내들의 마음이 뒤돌아서는 걸 알자 단념을 하고 덕 높은 현숙한 부인을 가장해서 그걸 내세워 자신의 약점을 속이려는 거죠. 그게 한 때 한때 이름을 날렸던 바람둥이 여자들의 잔꾀라구요. 멋쟁이 사내들의 버림을 받는다는 건 괴로운 거죠. 그렇게 버림을 받게 되면 그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정숙을 파는 수밖에 없는 거에요. 이런 현숙한 부인들은 준엄하기 이를 데 없어 모든 것에 까탈을 부리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용서하지 않으며 거만하게 개개인의 생활을 비난하기 바쁘죠. 그것도 자비심에서가 아니라 솟구치는 질투심에서 말이에요.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몸은 마음과 같지 않고, 그래서 남이 재미를 보고 즐기는 걸 참지 못하는 거라구요.
[빼르넬르 부인] (엘미르에게) 이런 얼토당토않은 넋두리가 네 마음에 든다는 거지. 얘야, 이 집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구나. 어부인이 상전이 되어서 온종일 수다를 떨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한마디쯤 해도 되겠지. 나는 내 아들이 그 믿음 깊은 분을 집에 모신 것은 퍽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희들의 비뚤어진 정신을 바로잡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분을 보내신 거야. 그러니 너희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그 분의 말을 들어야 해. 그 분이 나무라시는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야. 그 많은 방문객, 무도회, 재잘거림은 모두가 악덕의 소치다. 그런 데에선 믿음있는 말이란 들을래야 들을 수 없지. 쓸데없는 잡담에 넋두리, 그리고 쑥덕공론, 얻어 맞는 것은 대개가 이웃 사람으로 누구나 할 것 없이 욕지거리 뿐이잖느냐. 그러니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도 이런 모임에 가면 어리 벙벙해지게 마련이지. 하고많은 뜬소문이 어처구니없이 만들어지니까. 요전에도 어떤 박사님께서 멋있는 말을 하셨지. 끝없이 저마다 지껄여대면 진짜 바빌론의 탑이 무색할 지경이라고. 박사님께서 왜 그런 말을 하셨느냐 하면…… (끌레앙뜨를 가르키며) 봐라, 이 사람은 벌써 싱글싱글 웃고 있질 않니! 당신을 실컷 웃겨 줄 어릿광대나 찾아가시지. (이번에는 엘미르에게) 잘 있거라. 이젠 한 마디도 더 하고 싶지 않다. 이 집에는 정말이지 정떨어졌다. 당분간 발길을 하지 않을 작정이다. (프리뽀트의 뺨을 갈기며) 요년, 넌 뭘 멍청하니 서 있는 게야? 입을 딱 벌리고서! 기가 차서! 혼구멍을 내줄 테다. 자, 가자, 어서.
제 2장
끌레앙뜨, 도린느
[끌레앙뜨] 더 멀리까지 쫓아 나가 전송하는 건 사양하겠어. 또 싸움질을 하자고 덤빌까 겁나거든. 저 할머니는 ……
[도린느] 아, 그럼요! 그 말을 마나님께서 듣지 못하신 것은 유감이군요. 아마 들으셨더라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아직 그럴 나이도 아닌데 심한 소리를 하는 작자라고……
[끌레앙뜨] 아무것도 아닌 일로 우리에게 역정이나 부리시고! 그놈의 따르뛰프에게 홀딱 빠져서!
[도린느] 하지만 주인 어른께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분이 보셨다면 "이건 최악이다!"라고 말씀하셨을 거예요. 그 내란이 있었을 땐 현명한 분으로 임금님을 모시고 그 용기를 괴시했는데, 그 따르뛰프라는 사람에게 빠진 뒤로는 얼빠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니까요. 따르뛰프를 형제라고 부르면서 어머니나 아들, 딸, 부인보다도 백배나 더 소중히 대하거든요.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하는 것도 그에게 뿐이며 뭘 하든 그의 지시를 받아요. 껴안고 애무하고, 사랑하는 여자에게도 그처럼 다정할 수 없을 거예요. 식탁에서도 가장 상좌에 그를 앉히고, 6인분씩이나 먹어 치우는 걸 기꺼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뭐든 가장 맛있는 것은 그에게 바치라는 분부이고 트림이라도 할라치면 "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이렇게 말해요. 하여간 주인 어른은 정신이 나가신 것 같아요. 그 자는 주인 어른의 영웅, 그 모든 것이에요. 언제나 칭찬을 하고 말끝마다 그의 말뿐, 보잘것없는 행동도 기적으로 보이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신의 계시처럼 들리는 거죠. 그 자는 상대가 봉이라는 걸 아니까 실컷 빨아먹을 양으로 갖가지의 재주와 속임수로 주인 어른을 황홀케 하고 있고요. 그 위선에 가득 찬 신앙으로 끊임없이 돈을 거둬들이고 우리들 모두에게 뭔가 트집을 잡아 까탈을 부리려 든다니까요. 그리고 무서운 눈으로 설교를 하려고 와서는 리본이나 루즈 같은 애교점을 떼어 팽개칩니다. 요전에는 그 흉직한 자가 '성자의 꽃' 속에 꽂아 둔 네커치프를 발견하고는 찢어 버렸어요. 악마의 장식물을 신성한 것과 뒤섞어 놓는 것은 무서운 죄라나요.
제 3장
엘미르, 마리안느, 다미스, 끌레앙뜨, 도린느
[엘미르] (끌레앙뜨에게) 문까지 따라 나오지 않길 잘했어요. 거기서도 한바탕 설교를 늘어 놓으셨지 뭐에요…… 그리고 지금 그이가 오는 걸 봤는데, 나를 못 본 것 같으니까 이층에 올라가서 기다리겠어요.
[끌레앙뜨] 나는 여기서 잠깐 그를 만나서 그냥 인사라도 하고 가겠다.
[다미스] 여동생 결혼에 대해서 한마디 거들어 주세요. 따르뛰프가 이 일에 방해를 놓아서 아버지를 엉뚱한 데로 이끌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제가 이 혼담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아시죠? 여동생과 발레르가 서로 뜨거운 사랑을 주고받듯이 저도 발레르와 여동생을 사랑하고 있답니다. 만약……
[도린느] 주인 어른께서 들어오십니다.
제 4장
오르공, 끌레앙트, 도린느
[오르공] 아! 처남, 안녕하십니까.
[끌레앙뜨] 지금 막 가려던 참이었는데, 만나게 되니 반갑네. 시골은 아직 별로 꽃이 피지 않았겠지.
[오르공] 도린느 ……(끌레앙뜨에게) 저, 잠깐 실례. 집을 비워 둔 사이의 소식을 들어 두지 않으면 걱정이 돼서…… (도린느에게) 지난 이틀 동안 뭐 별다른 일 없었느냐? 다들 잘 있나? 모두 건강하고?
[도린느] 부인께서는 엊그저께 저녁때까지 일이 있으셨습니다. 알 수 없는 두통으로……
[오르공] 그래, 따르뛰프는?
[도린느] 따르뛰프? 그 분은 아주 잘 있어요. 통통하게 살이 찌고 얼굴 빛도 좋고 입술은 빨개요.
[오르공] 저런!
[도린느] 따르뛰프? 그 분은 아주 잘 있어요. 통통하게 살이 찌고 얼굴 빛도 좋고 입술은 빨개요.
[오르공] 저런!
[도린느] 부인께서는 저녁때는 몹시 기분이 언짢으셔서 저녁 식사를 전혀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만큼 두통이 심하셨어요.
[오르공] 그래, 따르뛰프는?
[도린느] 부인 앞에서 혼자 드셨어요. 아주 경건하게 자고새를 두 마리, 잘게 썬 염소 넓적다리를 절반 이상 먹어 치웠지요.
[도린느] 식사 후에 기분 좋은 졸음이 오는지 식탁을 떠나자 곧 방으로 가서 따뜻한 침대에 기어들어가 아침까지 푹 주무셨어요.
[오르공] 잘했군, 잘했어!
[도린느] 마침내 우리들 이야기를 받아들여 부인께서는 피를 뽑을 결심을 하셨습니다.
[오르공] 그래, 따르뛰프는?
[도린느] 언제나처럼 원기를 되찾으시고 어떤 약이라도 이겨낼 수 있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부인이 잃어버린 피를 보충한다고 아침 식사 때는 큰 컵으로 포도주를 넉 잔 마셨습니다.
[오르공] 잘했다, 잘했어!
[도린느] 결국 두 분 다 잘 계십니다. 저는 부인 방으로 가서 주인 어른께서 부인의 병후를 염려하고 계시다는 걸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5장
오르공, 끌레앙뜨
[끌레앙뜨] 매부! 저 애는 매부를 맞대놓고 비웃는 군. 화를 내도록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럴 만도 하군. 이런 뚱딴지같은 이야기가 어디 있나? 그 사람한테 어떤 매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즈음 세상에 한 사내를 위해 만사를 잊어버린다는 게 있을 수 있나? 찢어지게 가난한 자를 집에 받아들여 먹여주고 마침내는……
[오르공] 처남, 잠깐, 처남은 그 사람의 인품을 잘 모르지 않습니까.
[끌레앙뜨] 그렇다고 말하니까 모르는 걸로 해두지. 하지만 어떤 자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오르공] 알게 되면 처남도 홀딱 빠질 거요. 한없이 매혹되고 말 거야. 그 사람은…… 뭐라고 해야 좋을까……한 인간…….그래 한 인물이지.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마음의 평화를 맛보게 되고 이 세상을 하찮은 것으로 보게 돼요. 암, 그렇고말고. 그와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마치 딴 사람이 된 것 같아. 어떤 것에도 애착을 갖지 말라고 가르치고, 모든 집착에서 나의 영혼을 해방시켜 줘요. 부모, 형제, 자식과 아내의 죽음을 맞게 될지라도 요만큼도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끌레앙뜨] 그게 인정이라는 건가!
[오르공] 정말이야! 그 분을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보았다면 처남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 분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을 거라오. 그 분은 매일같이 교회에 나와서는 상냥한 모습으로 나의 바로 앞에 앉곤 했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그 열렬함, 신자들의 눈길은 일제히 그 분에게로 집중되었지. 커다란 믿음의 기쁨에 한숨을 쉬고 겸허하게 끊임없이 마루에 입을 맞추고,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먼저 뛰어 나와 문에서 성수를 뿌려 주었어요. 그 분을 따르는 소년은 모든 점에서 그 분을 닮았다고 할 수 있는데, 소년으로부터 그 분의 궁핍한 생활. 인감됨을 듣고 난 약간의 선물을 했다오. 그러면 언제나 겸손하게 그 일부를 돌려보내거든. "이건 너무 많습니다. 절반만 해도 많습니다. 저는 당신의 자비를 받을 만한 인간이 못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야. 내가 되돌려 받지 않겠다고 하면 내가 보는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뜻으로 그 분을 우리 집에 모시게 되었고, 그 후 만사가 순조로운 것 같아요. 모든 일을 보살피고, 내 체면을 생각해서 내 아내에게까지 몹시 신경을 쓰니까. 아내에게 유혹의 눈길을 던지는 자가 있으면 곧 알려 주고 나보다도 몇 배나 질투를 해주시거든. 그러나 그 분의 믿음이 얼마나 처남은 알 수 없을 거요. 그 분은 하찮은 일을 자기의 죄로 생각하시고 아무 일도 아닌 걸로 마음 아파하신다오. 저번에는 기도를 하던 중에 이를 잡아 홧김에 죽여 버렸다고 마음의 가책을 느끼실 정도였으니까.
[끌레앙뜨] 기가 막히는군! 매부님, 좀 도신 것 아니오. 그런 허튼 소리로 날 놀리는 건 아니겠지? 대체 그게 다 무슨 소리요? 그 헛소리 같은……
[오르공] 처남의 말에서는 무신앙이 느껴지는군요. 영혼이 약간 벌레 먹은 듯해요. 열 번도 더 말했지만, 뭔가 흉칙스러운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끌레앙뜨] 그건, 매부님, 그런 패거리들이 언제나 하는 소리요.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을 장님으로 만들고 싶은 거지. 확고한 눈을 가지고 있으면 신앙이 없는 자이고, 헛된 거짓 꾸밈새를 찬양하지 않으면 신성한 것에 대한 믿음도 존경도 없다고 하신다.? 하지만 그런 소릴 들어도 조금도 겁나지 않네.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며, 하늘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당신들 점잔 빼는 자들의 뜻대로 될 수는 없지. 거짓 용자(勇者)가 있는 것처럼 거짓 신자(信者)도 있는 법, 명예를 위해 행동하는 참된 용자는 떠들지 않는 것처럼, 온 세상이 뒤따라야 할 참된 신자는 뭐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고 법석을 떨지 않는다네. 대체 처남은 위선과 신앙을 구별할 줄도 모르나? 그걸 같은 말의 뜻으로 생각하고, 가면을 참된 얼굴과 같이 존경하고, 잔꾀를 성실성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진실과 외양을 혼돈하고, 유령을 인간과 같이 평가하며, 가짜 돈을 진짜와 같이 취급하려는 건가? 인간이란 대체로 알 수 없는 것, 그 본연의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란 결코 볼 수 없으니까. 이성이 미치는 범위가 너무 좁은 까닭에 누구나 그 한계를 넘어서 버리거든. 가장 고상한 것도 그걸 과장하고 지나치게 내세우려 함으로써 망치고 말지. 이건 말을 꺼낸 김에 하는 말이지만, 매부님!
[오르공] 그래요, 처남은 분명히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학자님이야. 세계의 모든 지식을 몸에 지니고, 혼자만이 유일한 현자요 식자(識者)요 신탁(信託)이자 현대의 카퉁이랄까. 처남 곁에서는 누구나 멍청하게 보이지.
[끌레앙뜨] 매부! 나는 존경받는 학자도 아니고, 세계의 온갖 학식을 몸에 지니지도 않았네. 하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가짜과 진짜를 구별할 정도의 학식은 가졌지. 나는 뛰어난 신자보다 존경받을 자 없고, 참된 신앙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열정보다 더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하네. 반면에 짐짓 신앙을 내세우는 꾸민 겉치레, 사기꾼 같은 자들, 눈길을 모으려는 신자들보다 더 밉살스러운 것은 없지. 그들은 사람을 속이고 신을 모독하는 얼굴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신성한 것을 아무 거리낌 없이 악용하고 제멋대로 가지고 놀거든. 이해 타산에 혈안이 된 마음으로 신앙을 장사로, 상품으로 생각하고 거짓 눈짓과 꾸민 믿음으로 신용과 위엄을 사려고 하는 자들, 이런 자들은 비상한 열성으로 하늘에의 길을 이용해서 재산을 불리고 있지. 열정적인 기도를 바치며 사람들의 호의를 구하고, 궁정(宮庭)의 한 복판에서 은거(隱居)를 하라고 설교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악덕과 신앙을 교묘하게 일치시키는 거지. 그들은 성질이 급하고 복수심이 강하며, 성실성이라고는 없는데다 약삭빠르며, 남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는 뻔뻔스럽게 하늘의 이해를 바라고 그들의 무서운 원한을 감추거든. 그들의 분노에 사로잡히면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무기를 우리에게 휘두르며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우리를 신성한 칼로 죽이려 하느니만큼 더욱 위험해지지. 이런 가짜 신자가 너무 많아. 그러나 또한 진정한 신자를 구별해 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지. 지금 세상에도 빛을 발할 정도로 모범이 되는 사람이 없지 않거든. 아리스통을 보게, 빼리앙들을 보게, 오롱트, 알시다마스, 뽀리돌, 크리탕들을 보게나. 그들의 신앙은 실로 인간적이며 친근감을 가질 수 있지. 그들은 우리의 행동을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다네. 남을 나무란다는 건 지나친 교만이라고 생각하니까. 잘난 체 큰소리치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들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는 거지. 겉으로 봐서 나쁜 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남을 선의로 해석하도록 노력한다네. 그들 사이에 도당을 만들거나 음모를 꾸미는 일은 절대로 없어. 온 정성을 다해서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할 뿐이지. 오직 죄만을 미워하지 않으며 지나친 열성으로 신 스스로가 원하는 이상으로 하늘의 이해에 상관하려 하지 않는다네. 그야말로 우리 편의 사람이요, 우리들이 취해야 할 태도지. 요컨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본보기로 삼아야 할 모범이라네. 솔직히 말해서 매부가 존경하는 그 사람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 자의 신앙심을 진정으로 칭찬하고 있지만 혹시 도금한 금빛에 눈이 부신 건 아닌지.
[오르공] 친애하는 처남, 다 끝났나요?
[끌레앙뜨] 끝났네.
[오르공] 그럼 이만 실례. (나가려 한다)
[끌레앙뜨] 잠깐, 한마디만, 아까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하고, 발레르는 매부의 사위가 되기로 약속되어 있지 않은가?
[오르공] 그렇소.
[끌레앙뜨] 혼사 날짜도 정했다던데?
[오르공] 사실이오.
[끌레앙뜨] 그런데 왜 혼사날을 연기하는 거지?
[오르공] 모르겠는데.
[끌레앙뜨] 뭐 다른 생각이라도?
[오르공] 그럴지도 모르지.
[끌레앙뜨] 약속을 깨뜨리려는 건가?
[오르공] 그렇진 않아요.
[끌레앙뜨] 약속을 지키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을 텐데.
[오르공] 경우에 따라서는.
[끌레앙뜨] 한마디면 끝날 걸 어째서 그렇게 빙빙 돌리나? 발레르는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 나더러 매부를 만나 달라고 했다네.
[오르공] 잘한 짓이군!
[끌레앙뜨]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오르공] 좋을 대로.
[끌레앙뜨] 하지만 매부의 생각을 알아야 대답을 할 게 아닌가. 대체 어떻게 할 작정인가?
[오르공] 하늘의 뜻에 따라야지.
[끌레앙뜨] 똑바로 말해 보세나. 매부는 발레르에게 약속을 했소. 그 약속을 지키는 건가, 안 지키는 건가?
[오르공] 안녕!
[끌레앙뜨] (혼자서) 발레르의 사랑에 장애가 없어야 할 텐데. 가서 모든 걸 이야기해 주어야겠군.
제 2막
제 1장
오르공, 마리안느
[오르공] 마리안느.
[마리안느] 아, 아버님.
[오르공] 이리 가까이 오너라. 은밀히 말해 둘 게 있으니까.
[마리안느] 뭘 찾으세요?
[오르공] (작은 방을 들여다보며) 누군가가 엿듣지는 않겠지…… 이곳은 남몰래 엿듣기에 딱 좋은 곳이거든. 음, 됐군. 마리안느, 나는 언제나 널 얌전하다고 생각하고 귀엽게 여겨 왔다.
[마리안느] 지금까지 아버님께서 주신 사랑에 진정으로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르공] 말 잘했다. 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내가 만족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마리안느] 그 이상 기쁨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르공] 그렇고말고. 우리 집에 머물고 있는 따르뛰프를 어떻게 생각하지?
[마리안느] 누가요, 저요?
[오르공] 너 말이다. 잘 생각해서 대답해라.
[마리안느] 어머나! 아버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대답하죠.
(그 때 도린느가 슬그머니 들어와서 오르공에게 들키지 않도록 뒤에 선다.)
[오르공] 아주 착한 대답이다. 그럼 이렇게 대답해다오. 그 분은 온몸이 높은 덕으로 빛나시며, 그 분이 네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그리고 아버지 마음에도 들어 남편으로 그가 선택되면 기쁘겠다고. 어떠냐?
(마리안느, 놀라서 뒷걸음친다.)
[마리안느] 네?
[오르공] 왜 그러느냐?
[마리안느] 뭐라고 하셨어요?
[오르공] 뭐?
[마리안느] 내가 잘못 들었나?
[오르공] 뭐라고?
[마리안느] 누구 말씀이신지? 제 마음을 사로잡았고, 아버님 마음에도 들어 남편으로 선택되었으면 기쁘겠다는 사람이?
[오르공] 따르뛰프.
[마리안느] 천만에요. 맹세코 아니에요. 아버님! 왜 그런 허튼 소리를 저더러 하라고 하시나요?
[오르공] 나는 그것이 진실이었으면 한다. 내가 그렇게 결정한 데 대해 별로 불만은 없겠지?
[마리안느] 아니! 저, 아버님께서는……
[오르공] 그렇다. 나는 두 사람을 결혼시켜서 따르뛰프를 이 집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그는 네 남편이 된다. 내가 그렇게 결정했다. 네 소원에 따라……
제 2장
도린느, 오르공, 마리안느
[오르공] (도린느를 발견하고) 거기서 뭘 하는 게냐? 그런 식으로 엿듣다니. 호기심이 지나치구나.
[도린느] 정말이지. 어떤 억측이나 우연의 장난으로 퍼진 헛소문으로 생각합니다만, 저도 이 혼담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전 그 때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웃어 넘겼지요.
[오르공] 뭐라고! 그럼 그게 믿을 수 없다는 거냐?
[도린느] 주인 어른께서 말씀하셔도 믿을 수 없을 정도에요.
[오르공] 믿을 수없다면 믿게 하는 방법이 있지.
[도린느] 네, 네. 농담을 잘도 하시는군요.
[오르공] 멀지 않은 장래에 실현될 이야기를 나는 하고 있는 거다.
[도린느] 설마!
[오르공] 내가 말하는 것은 장난이 아니야.
[도린느] 아버님 말씀을 믿지 마세요, 아가씨. 놀리고 계시는 거니까요.
[오르공] 내가 말하면……
[도린느] 뭐라고 하신대도 소용없어요. 절대로 믿지 않을 테니까요.
[오르공] 정 그러면 화를 낼 테다.
[도린느] 네, 그럼 믿기로 하죠.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민망합니다. 아니 그래, 얼굴 한복판에 긴 수염을 기르시고 분별이 있으실 듯한 어른이 정신 이상이라도 생기시기 전에야 어찌 그런……
[오르공] 이봐, 넌 요즘 함부로 입을 놀리는데, 내 비위를 거슬린단 마링야. 분명히 말했다.
[도린느] 주인 어른! 제발 역정내지 마세요. 그런 음모를 꾸미시다니, 사람들을 너무 놀리지 마세요. 아가씨가 그런 편협한 신자에게 어울릴 리가 없어요. 그 분도 또 자기대로 생각해야 할 딴일이 있고요. 게다가 그런 혼인을 해서 무슨 득이 있지요? 주인 어른처럼 재산도 있으신 분이 하필이면 그런 거지 사위를 고르실 필요가……?
[오르공] 닥쳐라. 그 분이 한푼도 없다면 바로 그 점이 그분의 존경받을 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 분의 가난은 바로 청빈하다는 증거니까. 그 가난이 그 분을 그 모든 위대함보다 더 높게 끌어올리는 거야. 그 분은 세속적인 것에 너무나 관심이 없고 한결같이 영원한 것에 집착하심으로써 결국 재산을 잃으신 거니까. 그러나 나의 도움으로 이 어려움을 벗어나고 재산을 다시 찾으실 수도 있을 거다. 고향에는 훌륭한 영토도 있다고 하고, 어떻게 보든 귀족임에는 틀림없으니까.
[도린느] 네, 본인이야 그렇게 말하겠죠. 하지만 그런 허풍은 신앙심을 내세우는 것과는 맞지 않아요. 티없는 성스러운 생활을 하는 자라면 자기의 이름과 가문을 그처럼 자랑삼아 떠벌이지도 않을 거에요. 믿음을 향한 겸허한 길은 요란스럽게 야심을 부리는 것과는 거리가 머니까요. 그 거만스러움이라니, 뭐에요? ……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주인 어른의 기분을 상하게 하니까. 그의 가문 이야기는 접어 두고 그의 인간됨을 이야기해 보죠. 그런 사내에게 아가씨 같은 따님을 주어도 그래 아무렇지도 않단 말씀이세요? 어울리는지 어떤지를 잘 따져서 이런 혼인의 결과를 생각하셔야지요. 신부의 의사가 무시된 결혼을 했을 때 흔히 정절을 못 지킨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훌륭한 아내로서 살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는 남편에게 달린 것, 수군수군 소문이 퍼지는 것도 흔히 남편이 아내를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남편이 꼴 같지 않으면 아내가 정절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싫은 남자를 딸에게 억지로 떠맡겼다가 딸이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그건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는 거죠. 주인 어른의 계획이 어떤 위험을 가져올지 생각하셔야 합니다.
[오르공] 나는 딸에게 올바른 삶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도린느] 제가 여쭙는 대로 하시는 게 제일입니다.
[오르공]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기로 하자. 마리안느,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내가 잘 알고 있다. 난 네 아버지니까. 발레르에게 널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도박을 즐긴다고 하는 데다가 신앙심조차 없는 것 같더구나. 교회에 드나드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
[도린느] 주인 어른께서 가시는 시간에 딱 맞춰서 거기로 달려가야 합니까? 사람들 눈에 띄기 위해 교회에 가는 사람들처럼 말이에요.
[오르공] 네 의견을 묻고 있는 게 아니다. 요컨대, 또 한 분은, 믿음으로 말하자면 그 이상 가는 사람이 없으며, 이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부귀라 할 수 있지. 이 결혼은 너의 모든 소원을 이루게 해 줄 것이며 부드러움과 기쁨에 푹 젖어들게 할 거다. 너희들은 신앙의 불꽃 속에서 두 어린애처럼, 두 마리의 산비둘기처럼 의좋게 사는 거지. 따분한 부부싸움 같은 건 하지도 않을 것이며, 너는 그 분을 소원대로의 남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도린느] 뭐라구요? 그런 사내를 남편으로 맞으면 오쟁이진 사내로 만들기 딱 맞죠.
[오르공] 이런, 방정맞은 소리!
[도린느] 제 말은 그 자의 꼬락서니가 그렇다는 거에요. 아가씨가 아무리 정숙하다고 할지라도 그 자가 타고난 사주팔자야 어쩌겠어요.
[오르공] 내 말을 가로채지 마. 그리고 네게는 아무 상관도 없느 일에 간섭하지 말고 입 닥치고 있는 게 좋을 거다.
[도린느] 주인 어른을 위해 말씀드리는 거에요. (도린느는 오르공이 딸에게 말을 하려고 돌아설 때마다 말을 가로챈다)
[오르공] 지나친 친절이야. 이제 좀 닥쳐.
[도린느] 주인 어른을 생각해서…….
[오르공] 생각해 줄 필요 없다.
[도린느] 주인님께서 싫다고 하시더라도 저는 생각해 드리고 싶은걸요.
[오르공] 이런!
[도린느] 주인 어른의 명예에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되잖겠어요. 일부러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다니, 참을 수 없어요.
[오르공] 닥치지 못해?
[도린느] 그런 혼인이 이루어지도록 보고만 있는다는 건 제 양심이 허락지 않아요.
[오르공] 닥치라니까. 뱀처럼 염치없이 지껄여대다니…….
[도린느] 어머나, 신자도 화를 내시나요!
[오르공] 물론이지, 그따위 소리르 들으면 속이 뒤집힌다. 확실하게 입을 닥치게 해줄 테다.
[도린느] 좋습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하는 바가 달라지는 건 아니예요.
[오르공] 멋대로 생각해라. 하지만 앞으로 나에게 말할 때 조심해서 하지 않으면…… 됐어. (딸을 돌아보며) 나는 멍청하지 않은 인간으로서 충분히 모든 것을 생각했다.
[도린느] (방백) 입을 다물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지는군. (그러다가 오르공을 돌아보면 입을 다문다.)
[오르공] 멋쟁이 청년은 아니지만 따르뛰프는…….
[도린느] (방백) 네, 낯짝이 일품이죠.
[오르공] 모든 다른 점이 네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도린느] 아가씨 앞길이 눈에 본 듯 뻔하군! (오르공은 도린느 쪽으로 돌아서서 팔짱을 끼고 똑바로 그녀를 쳐다본다.) 내가 아가씨의 입장이라면 강제로 결혼한 남자는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결혼식만 끝나면 여자는 언제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걸 금방 알려 주고말고.
[오르공] (도린느에게) 그래, 내 말을 안 들을 작정이냐?
[도린느] 나무라실 것 없어요. 주인 어른께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니까요.
[오르공] 그게 아니면 뭘 하는 거냐?
[도린느] 혼잣말을 하고 있는 거에요.
[오르공] 좋아. (방백)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자면 뺨을 한대 갈겨 줘야겠군. (그는 뺨을 때릴 자세를 취한다. 도린느는 오르공이 노려볼 때마다 입을 다물고 꼿꼿이 선다) 얘야! 넌 내 계획에 찬성이지? …… 알겠지. 내가 고른 남편감은 ……. (도린느에게) 왜 말이 없느냐?
[도린느] 말할 게 없으니까요.
[오르공] 한마디 해보시지.
[도린느]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저는
[오르공] 그걸 기대하고 있었는데.
[도린느] 제가 뭐 천친가요!
[오르공] 어쨌든 내 마을 따라서 내가 고른 신랑을 공손하게 받아들이는 거다.
[도린느] (달아나며) 그런 남편을 얻다니! 웃음거리죠.
오르공은 도린느의 뺨을 갈기려 하나 실패한다
[오르공] 마리안느! 너에겐 병마가 붙었구나. 저런 것과 한집에 사니 나까지도 죄를 범하게 된다. 이 이상 말을 계속할 기분이 아니다. 고것이 버릇없이 지껄여대는 바람에 울화가 치밀어서 정신이 다 없을 지경이야. 밖에 나가서 바람을 좀 쏘이고 마음을 가라앉혀야겠다.
제 3장
도린느, 마리안느
[도린느] 아가씨는 벙어리라도 되셨어요? 내가 대변인 역할을 해야 하게……. 그런 어이없는 소리를 듣고도 말 한마디 못하다니!
[마리안느] 고집불통 아버지에게 어떻게 하란 말이니?
[도린느] 그런 공갈쯤 피하도록 해야죠.
[마리안느] 어떻게?
[도린느] 이렇게 말하죠. 사랑이라는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결혼은 자신을 위해 하는 거지 아버지를 위해 하는 게 아니라고, 모든 일이 아가씨의 일이요. 남편이 마음에 들어야 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가씨라고. 따르뛰프가 그렇게 마음에 드시면 본인이 결혼 하시라고.
[마리안느] 아버님은 우리에겐 너무나 무서운 존재이신걸. 감히 맞대어 말씀드릴 용기가 나에겐 없어.
[도린느]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세요. 발레르 님은 아가씨에게 청혼을 해오셨어요. 그 분을 좋아하세요. 아니면 싫어하세요?
[마리안느] 아, 내 사랑을 그렇게밖에 생각지 않다니, 도린느! 감히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어? 내 마음은 벌써 수백 번도 더 말했고, 내가 얼마나 그 분을 그리워하는지 잘 알면서?
[도린느] 그것이 빈말인지 아닌지 누가 알며, 정말로 그 분을 사모하는지 어떻게 알 게 뭐예요?
[마리안느] 너무해, 도린느. 의심을 하다니…… 내 진심이 어떻다는 건 너무나 잘 알 텐데.
[도린느] 그럼 사랑하시는 거에요?
[마리안느] 그럼, 마음 깊이.
[도린느] 그 분도 아가씨를 사랑하시는 것 같던데, 어떠신가요?
[마리안느] 그렇다고 생각해.
[도린느] 두 사람이 한결같이 서로 결혼하기를 바라시는 거죠?
[마리안느] 물론이지.
[도린느] 그럼 또 하나 다른 혼담은 어떻게 하죠?
[마리안느] 그 결혼을 강요당하면 난 죽어 버리겠어.
[도린느] 멋있군요. 그런 수단이 있다는 걸 미처 몰랐네요. 골칫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죽어 버리면 된다는 거죠? 아주 훌륭한 방법이에요.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전 울화가 치밀어요.
[마리안느] 어머나! 왜 그렇게 화를 내지? 내 슬픔을 그렇게도 몰라 주다니.
[도린느] 그따위 객쩍은 소리나 하고 막상 기회가 오면 아가씨처럼 맥이 빠져 버리는 사람에겐 동정할 수가 없어요.
[마리안느] 하지만 어떻게 하겠어? 내가 소심해서 그런 걸.
[도린느] 그러나 마음에 사랑이 깃들이면 강해지는 법이에요.
[마리안느] 발레르의 연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확고한 태도를 갖고 있잖아? 아버님께 나와의 결혼을 허락받는 건 그분의 역할이 아니니?
[도린느] 뭐라구요! 아버님이 괴짜로 소문난 그 따르뛰프에게 홀딱 빠져서 일단 정한 혼인을 깨뜨려도 아가씬 그게 아가씨 애인의 잘못이라는 거예요?
[마리안느] 그럼 그때 내가 단호가게 거절하고 경멸의 빛을 뚜렷이 나타내며 내가 선택한 사람에게 정신없이 빠져 있다는 걸 보였어야 했니? 그 분에 대한 사랑이 아무리 뜨거울지라도 그 때문에 여자의 수줍음을 잃고 딸의 도리를 지키지 않아도 돼? 내 연정을 세상에 드러내고…….
[도린느] 아뇨, 아뇨. 천만에요. 아마도 따르뛰프라는 그 작자한테 시집가고 싶으신 모양인데, 그 혼담을 방해했다가는 내가 몹쓸 여자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아가씨의 소원을 가로막을 까닭이 없지 않아요? 스스로 결정을 내린 것은 잘한 일이에요. 따르뛰프 씨! 오! 오! 아버님이 권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었군요. 잘 생각해 보면 따르뛰프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그의 반려자가 된다는 건 보통 복이 아니고요. 모든 사람이 그를 칭송하고 있고, 고향에서는 귀족이라죠. 몸내는 쑥 빠졌고 귀는 빨갛고 안색은 꽃과 같고, 그런 남편과 같이라면 퍽 행복하시겠어요.
[마리안느] 어쩜……!
[도린느] 그렇게 훌륭한 남편의 아내가 될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마리안느]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리고 이 호담을 없었던 일로 하는 데 네가 도와줘, 내가 손 들었어. 뭐든 할 테니까.
[도린느] 아니에요. 비록 원숭이를 남편으로 삼으라고 할지라도 복종해야지요. 아가씨는 정말 운이 좋아요. 대체 한탄할 게 뭐가 있어요. 역마차를 타고 그 분의 작은 고을로 간다. 백부라든가 사촌이 많이 있어서 그들과 사귀는 것은 퍽 재미있을 거야. 먼저 그곳의 상류 사회에 소개되고 도착 인사로 대법관 부인, 지방관 부인을 방문한다. 부인들은 아가씨에게 경의를 표해서 접는 의자를 권한다. 사육제에는 무도회와 대음악회를 기대할 수 있겠지. 알고 보면 퉁소 두 개만이 연주되는 그런 음악회지만……. 때로는 재주 부리는 원숭이와 인형극을 볼 테고, 물론 아가씨의 남편이…….
[마리안느] 그만! 그 정도면 됐어. 그보다도 어떻게 해야 이 난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 봐.
[도린느] 어떻게 감히 내가……? 할 수 없어요.
[마리안느] 제발 도린느, 그러지 말고…….
[도린느] 이 혼담이 이루어져서 혼이 좀 나봐야죠.
[마리안느] 제발 부탁이야!
[도린느] 싫어요.
[마리안느] 내 소원을 분명히 해서…….
[도린느] 안 돼요. 따르뛰프는 아가씨의 남편, 그렇게 되고 말 거예요.
[마리안느] 너에게만 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는데, 그러니까 나에게…….
[도린느] 안 돼요. 아가씨는 틀림없이 따르뛰프 부인이 될 거예요.
[마리안느] 그럼 좋아! 내가 얄궂은 운명에 이끌려 가도 아무렇지 않다면, 앞으로 내가 만사를 포기해도 상관 말아. 자포자기가 되어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이 괴로움에서 빠져나갈 확실한 방법을 나는 알아. (나가려 한다)
[도린느] 자, 자! 돌아오세요. 이제 그만 할 테니까요. 하여간 아가씨에게 동정을 하겠어요.
[마리안느] 이처럼 지독한 고통을 당할 바에는, 알겠어? 차라리 난 죽고 말 테야.
[도린느] 염려 마세요. 아주 빈틈없이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어머, 저기 아가씨가 좋아하는 발레르 님이 오시네요.
제 4장
발레르, 마리안느, 도린느
[발레르] 아가씨!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묘한 소문이 들리더군요.
[마리안느] 어떤?
[발레르] 당신이 따르뛰프와 결혼하게 된다는…….
[마리안느] 아버님이 그런 생각을 하신 것은 틀림없어요.
[발레르] 아버님이……?
[마리안느] 갑자기 마음이 달라지셔서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발레르] 뭐요? 진지하게?
[마리안느] 네, 아주 진지하게요. 이 혼인을 성사시키고 말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발레르] 그래, 당신 생각은?
[마리안느] 모르겠어요.
[발레르] 대답 한번 시원스럽군요. 모르신다?
[마리안느] 네.
[발레르] 네라뇨?
[마리안느]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발레르] 그자와 결혼하면 좋겠군요.
[마리안느] 그렇게 하라는 말씀인가요?
[발레르] 네.
[마리안느] 진정이세요?
[발레르] 물론이죠. 그 자는 훌륭한 신랑감이죠. 얌전하게 말을 들을 만한 가치가 있어요.
[마리안느] 좋아요! 충고하시는 거라면 충고에 따르겠어요.
[발레르] 충고를 따르는 데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마리안느] 충고를 해주신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요.
[발레르] 나는 당신 마음에 들려고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마리안느] 나도 당신 마음에 들기 위해 따를 뿐이에요.
[도린느] (무대 뒤쪽으로 물러서며) 이 일이 어떻게 되어갈지 좀 두고 보아야겠는걸.
[발레르] 그래, 그게 사랑한다는 겁니까? 그건 속임수였군요. 언젠가 당신이…….
[마리안느] 제발 그 말은 그만두기로 해요. 당신은 솔직하게 말씀하셨어요. 아버님이 권하는 남편을 받아들이라고요.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죠. 당신이 그처럼 유익한 충고를 해주신다면 저로서도 그 충고에 따르겠다고요.
[발레르] 내 생각을 따르느니 어쩌니 하고 변명하지 말아요. 당신 결정은 이전에 이미 되어 있었던 거니까요. 하찮은 구실을 내세워 약속을 깨드리려는 거죠?
[마리안느] 그래요, 잘 말씀하셨어요.
[발레르] 물론이죠. 당신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마리안느] 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자유지요.
[발레르] 네, 네. 내 자유이고말고요. 그러나 나도 내 감정을 짓밟힌 이상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마음을 바치고 청혼을 할 상대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
[마리안느] 그러시겠죠. 당신의 인품에 끌려서……
[발레르] 인품을 운운할 때가 아니에요. 나는 보잘것없는 인간이오. 당신이 그걸 증명해 준 셈이니까. 그러나 다른 여자가 나에게 호의를 갖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당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게 확실해지면 거리낌없이 나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마리안느] 대단한 상처가 아니겠지요. 상대를 바꾸어서 마음을 달래실 테죠.
[발레르]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죠. 그렇게 생각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버림을 받게 되면 체신이라도 지켜야죠. 그런 사람을 잊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그래도 잘 되지 않으면 잊어버린 양 가장이라도 한다, 외면한 여자에게 미련을 갖는 비열한 태도는 켤코 용서될 수 없으니까요.
[마리안느] 훌륭하고 거룩한 마음씨로군요.
[발레르] 그렇고말고요, 서로 불평할 건 없을 거예요. 아니, 그럼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모하고 있으란 말이여, 당신에게 버림을 받고도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내 눈앞에서 당신이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보고 있으라 이겁니까?
[마리안느] 천만에요. 내가 바라는 것은 지체없이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는 거예요.
[발레르] 진정 그걸 바라신다는 겁니까?
[마리안느] 네.
[발레르] 이 정도 모욕을 받았으면 됐어요. 지금 당장 내려가서 당신을 만족시켜 드리지요. (그는 나가기 위해 한 발짝 떼었다가 다시 들어온다)
[마리안느] 네, 그러세요.
[발레르] (되돌아오며) 적어도 나에게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당신이라는 것만큼은 잊지 마십시오.
[마리안느] 네
[발레르] 그리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당신의 전례에 따랐을 뿐이라는 것도.
[마리안느] 나의 전례를요? 좋아요.
[발레르] (나가며) 됐어요. 언제든 당신이 원할 때 해보일 테니까.
[마리안느] 아주 잘됐어요.
[발레르] (다시 돌아오며) 이제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요.
[마리안느] 마침 잘됐어요.
[발레르] 네? (그는 나가려다 말고 문에서 뒤돌아본다)
[마리안느] 뭐죠?
[발레르] 부르지 않았나요?
[마리안느] 내가요? 설마
[발레르] 그럼, 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는 서서히 나간다)
[마리안느] 안녕히 가십시오.
[도린느] (마리안느에게)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시다니 어떻게 된 것 아니에요? 두 분의 다툼이 대체 어디까지 갈까 하고 보고 있었어요. 이보세요. 발레르 님! (그녀는 발레르의 팔을 잡는다. 그는 굳이 뿌리치는 체한다)
[발레르] 허! 도린느, 왜 이래?
[도린느] 이리 오세요.
[발레르] 싫다. 싫어. 난 화가 나서 못 견디겠어. 아가씨 소원대로 하려는 거니까, 말리지 마!
[도린느] 기다리세요
[발레르] 안 돼. 내 마음은 이미 결정됐으니까.
[도린느] 아!
[마리안느] (방백) 나를 보는 게 싫은가 봐. 내가 있어서 나가려는 거야. 이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 낫겠어.
[도린느] (발레르를 두고 마리안느에게 달려간다) 이번에는 아까시……. 대체 어딜 가려는 거죠?
[마리안느] 놔
[도린느] 돌아오세요
[마리안느] 싫어, 싫어 날 붙들려 해도 소용없어.
[발레르] (방백) 나를 보는 게 괴로운 모양이야. 어서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어.
[도린느] (이번에는 마리안느를 두고 발레르에게 달려가서) 또 그러세요?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 마음에 없는 짓은 그만 하고 두 분 다 이리 오세요. (그녀는 둘을 잡아 끈다.)
[발레르] (도린느에게) 어쩔 셈이야?
[마리안느] (도린느에게) 뭘 하려는 거야?
[도린느] 두 분을 화해시키고 싸움의 끝맺음을 하자는 거죠. (발레르에게) 이런 다툼질을 하다니, 정신이 어떻게 되신 것 아니에요?
[발레르] 그녀가 나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듣지 않았어?
[도린느] (마리안느에게) 그렇게 화를 내다니, 정신 나가셨어요?
[마리안느] 내가 그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너도 보지 않았니?
[도린느] (발레르에게) 두 분 다 멍청해요. 아가시는 당신에게 몸을 맡기는 것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내가 증인이에요. (마리안느에게) 이분은 아가씨만을 사랑해요. 아가씨의 남편이 되는 것 말고는 다른 소원이 없어요. 목숨을 걸고 보증해요.
[마리안느] (발레르에게) 그렇다면 왜 그런 충고를 하셨나요?
[발레르] 그런 걸 왜 나에게 묻는 거요?
[도린느] 두 분 다 좀 이상해요. 자, 서로 손을 잡으세요. (발레르에게) 자, 당신부터.
[발레르] (도린느에게 손을 내밀며) 내 손으로 뭘 하려는 거지?
[도린느] 아휴! (마리안느에게) 자, 아가씨도
[마리안느] (역시 손을 내밀며) 이런 짓을 해서 뭘 해?
[도린느] 어마나! 자, 이제 앞으로 나오세요. 두 분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어요.
(발레르와 마리안느는 잠시 서로 딴 곳을 쳐다보며 손을 잡고 있다.)
[발레르] (마리안느에게 돌아서며) 무슨 일리아도 마지못해 하는 게 아니에요. 화를 내지 말고 잠깐 날 보면 어때요.
(마리안느는 슬그머니 발레르를 쳐다보며 약간 미소를 짓는다)
[도린느] 솔직히 말해서 연인들이란 모두 돌았어요!
[발레르] (마리안느에게) 내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죠. 솔직히 말해서 나를 괴롭히는 말을 하고 좋아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마리안느] 당신이야말로 가장 몰인정한 사람 아니시던가요?
[도린느] 그 논쟁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지금은 그 고약한 혼담을 깰 방법이나 연구해 봐요.
[마리안느]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줘.
[도린느]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죠. (발레르에게) 도련님 아버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웃어 넘기시죠? 터무니없는 소리라고요. (마리안느에게) 하지만 아가씨는 아버님께서 무슨 말을 하시든 겉으로는 온순하게 받아들이는 게 나아요. 그렇게 하는 것이 긴급한 사태가 발생하게 되더라고 그 혼담을 연기시키기에 좀더 쉬울 테니까요. 시간 여유만 있다면 뭣이건 수가 생기니까요. 갑자기 아프다는 핑계로 날짜를 뒤로 미룰 수도 있을 게고, 운 나쁘게 장례행렬을 만났다든가, 거울을 깼다든가, 흙탕물 꿈을 꾸었다든가, 그런 불길한 전조를 구실삼을 수도 있을 거예요. 아무튼 무엇보다도 다행인 건 아가씨가 승낙하기 전에는 발레르 님 아닌 다른 사람과는 결혼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죠. 그러나 일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는 두 분이 함께 계시는 것을 들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발레르에게) 자, 돌아가세요. 지체없이 친구들의 힘을 빌어 주인 어른이 약속한 바를 지키도록 하세요. (마리안느에게) 우리는 외삼촌의 도움을 받아 어머님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도록 해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발레르] (마리안느에게) 모두가 어떤 노력을 하든 내가 무엇보다도 믿고 있는 것은 당신이라오.
[마리안느] 아버님의 의사가 어떻게 움직일지 그건 보증할 수 없지만, 발레르 당신 아닌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어요.
[발레르]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구료!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도린느] 아! 연인들이란 아무리 조잘거려도 지치지 않나 보군요. 자 어서 나가세요.
[발레르] (한 발자국 가다가 되돌아온다) 결국은…….
[도린느] 또 수다를 떠실려고! 한쪽은 이쪽으로, 당신은 저쪽으로 (도린느는 둘의 어깨를 떠밀며 두 사람이 헤어지도록 한다)
제 3막
제 1장
다미스, 도린느
[다미스] 어떠한 존경심이나 권력도 나를 얌전하게 떼어 두지는 못할 것이며, 내가 뭔가 한바탕 하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벼락을 맞아 죽어도 좋고 어디서이건 형편없는 하인 취급을 받아도 좋다.
[도린느] 제발 그렇게 흥분하지 마세요. 아버님께서는 그저 그런 말을 하셨을 뿐이니까요. 누구나 생각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 계획을 세워서 이루기 위해서는 먼 길을 가야 해요.
[다미스] 그 작자의 음모를 막아야 해. 아버님께도 말씀드려야지.
[도린느] 자, 그러지 말고 마음을 가라않히세요! 그 자에 대해서나 아버님에 대해서나 함부로 굴지 못하고, 어머님 말씀이라면 아첨을 하거든요. 어쩌면 어머님께 마음이 있는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잘된 거죠! 이야기가 멋지게 되는 거예요. 하여간 어머님께서는 도련님을 위해 그 자를 부른 겁니다. 도련님이 걱정하고 있는 결혼에 관해서 그의 마음을 떠보고 그의 기분을 알아보시려는 거예요. 그리고 그가 끝내 계획을 실현시킬 생각이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걸 그에게 말할 겁니다. 그의 종복 말이 지금은 기도중이어서 만나지 못했지만 곧 내려온다고 그러더군요. 그러니 제발 여기서 나가주세요. 나 혼자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요.
[따르뛰프] 제 기도는 하늘에서 그만한 은총을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부인의 건강이 회복되시길 빌며 열렬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엘미르] 저에 대한 염려로 퍽 마음을 쓰신 모양이군요.
[따르뛰프] 부인의 건강은 아무리 소중히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부인께서 회복되신다면 기꺼이 제 건강과도 맞바꾸겠습니다.
[엘미르] 그건 기독교도로서의 자비를 지나치게 베푸시는 겁니다. 모든 호의에 대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따르뛰프] 부인의 인품을 생각한다면 저의 정성 따위는 오히려 부족합니다.
[엘미르] 어떤 일에 대해서 은밀히 상의드렸으면 해서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정말 다했이군요.
[따르뛰프] 저도 마찬가지로 기쁘게 생각하니다. 부인과 단둘이 마주보고 있을 수 있다니, 가슴이 부풀어 오릅니다. 이 같은 기회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원드렸는데, 지금까지는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었어요.
[엘미르] 저는 몇 마디 상의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마음을 털어놓고 숨김없이 말해 주세요.
(다미스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이 대화를 듣기 위해 숨어 있는 방의 문을 살짝 연다)
[따르뛰프] 저도 이 다시없는 기회에 속마음을 털어놓고 보여 드릴까합니다. 맹세코 말씀드리는데, 부인의 매력에 끌려 많은 방문객이 이 집을 드나드는 것에 대해 이제껏 귀찮게 말씀을 드렸던 것은 결코 증오심에서 한 짓이 아닙니다. 그건 한결같이 부인을 향한 정열과 순수한 마음에서…….
[엘미르]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의 영혼이 구원을 위해 마음을 쓰신다고요.
[따르뛰프] (그녀의 손가락 끝을 잡으며) 그렇습니다. 부인. 이 불타는 정열…….
[엘미르] 어머나! 아파요. 그렇게 세게 잡으시면.
[따르뛰프] 정열이 지나쳐서 부인을 아프게 하다니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엘미르의 무릎 위로 손을 가져간다)
[엘미르] 그 손으로 뭘 하세요?
[따르뛰프] 부인의 옷을 만지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천이군요.
[엘미르] 어마나! 제발 그러지 마세요. 간지러워요. (그녀는 의자를 뒤로 옮긴다. 그러자 따르뛰프는 자기 의자를 가까이 가져간다)
[따르뛰프] (엘미르의 숄을 만지며) 이건 참 훌륭한 천입니다. 요즈음은 솜씨들이 대단히 좋아지기는 했습니다만, 이처럼 잘 짜여진 것은 결코 보지 못했습니다.
[엘미르] 네, 그래요. 이제 우리 용건에 대해서 좀 이야기하죠. 남편은 자신의 약속을 깨뜨리고 당신과 딸을 결혼시키려고 한다는데, 정말인가요?
[따르뛰프] 그런 말씀을 잠깐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건 제가 바라는 행복이 아닙니다. 저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 주는 행복, 찬란한 매력은 다른 데 있습니다.
[엘미르] 그건 당신이 이 지상의 것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이죠.
[따르뛰프] 저의 가슴에도 돌로 된 심장이 들어 있는 건 아니랍니다.
[엘미르]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당신의 기원은 모두 하늘을 향해 있고, 이 세상의 것은 아무것도 당신의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따르뛰프] 우리를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맺어 주는 사랑도 지상의 것에 대한 사랑을 질식시키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의 감각은 신이 만드신 완벽한 작품에 쉽사리 매혹됩니다. 당신들 여성에게는 깊은 매력이 있습니다. 눈을 놀라게 하고 마음을 황홀케 하는 아름다움이 당신 얼굴에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완벽한 피조물이라 할 수 있는 당신을 볼 적마다 창조자이신 신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스스로를 그린 가장 아름다운 초상을 보고 제 마음은 열정적인 사랑에 사로잡혔습니다. 처음엔 이 남모르는 정열을 악마의 교묘한 함정이나 아닌가 염려하고 당신의 눈길을 피하려고 애쓴 적도 있었습니다. 당신을 저의 구원에의 길을 막는 장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 사랑스러운 아름다운 그대여! 마침내 저는 이 정열이 죄가 될 수 없으며 정숙함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는 그 정열에 마음을 맡겼습니다. 이 마음을 감히 당신께 바친다는 것은 참으로 지나친 만용이라 하겠습니다만, 저의 소원은 전적으로 부인의 호의에 달려 있으며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저의 헛도니 노력에 전혀 기대를 걸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의 희망, 저의 행복, 저의 마음의 평와, 이 모두가 당신 속에 있으며 괴로움을 당할 것인가, 무상의 기쁨을 얻느 것인가 또한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요컨대 저는 당신의 마음에 따라서 행복해질 수도 또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엘미르] 꽤 품위있는 고백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사실 전 약간 놀랐습니다. 마음을 더 굳건히 가지시고 그런 일에 대해서는 좀더 경우를 따져서 생각하셔야죠. 당신 같은 독실한 신자로서, 어디서나 그렇게 말하기……
[따르뛰프] 독실한 신자라 해도 저 역시 인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아름다움에 내 마음은 사로잡히고 이성은 저 멀리 사라지고 맙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의외로 느껴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부인, 저는 천사가 아닙니다. 저의 고백을 나무라시기 전에 당신의 황홀한 매력을 책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빛나는 것을 본 이후 저의 마음은 당신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성스러운 눈길의 그지없는 부드러움은 끝까지 저항하려는 저의 마음을 정복해버렸습니다. 단식도 기도도 눈물도 헛된 것을 뿐, 저의 모든 소원이 당신의 매력을 향해 쏠렸습니다. 저의 눈과 한숨이 벌써 무수히 당신께 호소했습니다만, 제 마음을 더욱 잘 설명하기 위해 음성의 힘을 빌리는 겁니다. 보잘것없는 당신의 노예의 괴로움을 인지한 마음으로 바라봐 주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위로해 주시고 황량한 제 마음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신다면 오, 황홀한 기적이여! 저는 더할 수 없는 사랑의 헌신을 당신께 바칠 것입니다. 저와 더불어서라면 당신의 명예에 금갈 염려가 없으며, 제가 당신을 저버린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인들이 빠져들 듯 좋아하는 궁정의 멋쟁이들은 죄다 그 행실이 요란하고 그 말에는 성의가 없습니다. 사랑의 솜씨가 좋아졌다고 끊임없이 잘난 체하며 여인의 호의를 받으면 그걸 여기저기 떠들고 다닙니다. 여인들은 그들의 조심성없는 혀를 믿고 있습니다만 그야말로 마음을 바칠 제단을 더럽히는 짓입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후미진 사랑의 불길에 타는 자를 상대로 하면 언제까지나 비밀이 새어 나갈 염려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평판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책임을 지는 겁니다. 저의 마음을 받아들여 주시면 추문이 따르지 않는 사랑, 두려움없는 쾌락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엘미르] 알겠습니다. 퍽 노골적인 표현을 하시는데, 그만하면 알아듣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열렬한 사랑의 속삭임을 제가 남편에게 일러바치지나 않을까, 그처럼 성급한 사랑의 고백이 남편의 당신에 대한 우정을 해치진 않을까 염려해 보지는 않으셨나요?
[따르뛰프] 당신은 그지없이 선량한 마음씨를 가졌습니다. 그러니 제 경솔한 행동을 용서해 주실 겁니다. 너무나 격렬한 사랑의 열정으로 해서 부인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지라도 인간 누구나가 지니는 약점으로 너그러이 봐주시리라 믿습니다. 부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생각하시고, 제가 장님이 아니라는 것, 또 인간이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십시오.
[엘미르] 다른 여자라면 그 말씀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몸가짐을 더욱 조심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남편에게 한마디도 않겠습니다. 그 대신 하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발레르와 마리안느의 혼담에 트집잡지 마시고 쉽사리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신 자신 그 애 부친의 그릇된 권력을 이용하지 마시고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재산을 탐내지 않았으면 해요. 그리고…….
제 4장
엘미르, 다미스, 따르뛰프
[다미스] (숨어있던 방에서 나오며) 안 돼요! 어머님, 안돼요. 모든 사람에게 얘기해야지요. 저는 저기서 모든 걸 다 들었습니다. 하늘의 뜻이 저를 그곳으로 인도한 것일 겁니다. 그럼으로써 저를 해치는 악당의 교만한 콧대를 꺾어 놓고 그 자의 위선과 오만불손에 앙갚음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아버님을 깨우쳐 드리고, 어머님께 사랑을 속삭이는 악당의 본성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엘미르] 안 돼, 다미스. 이 분이 더 총명해지시고 나의 호의에 보답하도록 노력해 주면 그걸로 다 된 거야. 일단 약속한 이상 그 약속을 내가 지킬 수 있도록 해다오. 법석을 떠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 현명한 여자는 이런 어리석은 일쯤 웃어 넘기고 남편에게 그런 걸 알려서 걱정을 끼치지 않는 법이다.
[다미스] 어머님께서 그렇게 행동하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죠. 그러나 제가 다른 행동을 취하는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자를 너그러이 봐준다면 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이 자가 위선으로 꾸며진 신앙을 내세우고 오만불손하게 나오는 바람에 저의 정당한 분노는 짓밟히고 온 집안이 뒤죽박죽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 사기꾼은 정말로 오랫동안 아버님을 속여 왔습니다. 그리고 저와 발레르의 우정의 불길에 재를 뿌려 왔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이런 자에게 이제 그만 농락당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늘은 저에게 절호의 기회를 내리신 겁니다. 이 기회를 갖게 된 것도 하나님 덕택, 그냥 넘겨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기회입니다. 기회를 잡고도 이용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그 기회를 다시 앗아간대도 할말이 없습니다.
[엘미르] 다미스…….
[다미스] 아닙니다. 저는 저의 신념에 따라 행동합니다. 저의 마음은 지금 기쁨으로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어머님이 뭐라고 말씀하셔도 이 복수의 기쁨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 이상 주저할 것 없이 일을 해치워야지. 자, 때마침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실 분이 오시는군.
제 5장
[다미스] 아버님, 오시자마자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드려야겠습니다. 무척 놀라실 테지만요. 아버님의 모든 후의는 충분히 모상된 셈입니다. 이 분은 아버님의 친절에 훌륭한 보답을 하신 겁니다. 아버님에 대한 그의 크나큰 애정이 분명히 표시된 거죠. 즉 아버님의 체면에 먹칠을 않고는 못 배긴 거니다. 저는 이 자가 뻔뻔스럽게도 어머니께 사랑의 고백을 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워낙 상냥하시고 조심성있는 분이신 까닭에 어떻게 해서라도 이 일을 덮어두려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이런 파렴치한 짓을 그대로 보아 넘길 수가 없습니다. 아버님께 숨기는 것은 그야말로 아버님을 모욕하는 게 됩니다.
[엘미르] 그래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로 남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아서는 안 되며, 그런 일로 체면이 손상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스스로 몸을 지킬 줄 알면 그걸로 되는 것이라고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다미스가 내 말을 좀 더 들어줬더라면 당신에겐 이런 말을 전혀 안해도 되었을 텐데요.
제 6장
오르공, 다미스, 따르뛰프
[오르공] 오, 하늘이여! 지금 내가 들은 소리가 믿을 수 있는 일일까?
[따르뛰프] 네, 그렇습니다. 형제여! 저는 악인이고 죄인입니다. 부정 투성이의 불행한 죄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대악당입니다. 저의 생애의 모든 순간이 오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죄악과 추잡함의 축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이 저를 벌하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 고행을 내리시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아무리 커다란 벌을 내리신다 할지라도 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말씀을 믿으시고 더욱 화를 내시고 죄인으로서 저를 이 집에서 내쫓아 주십시오. 어떠한 치욕을 받을지라도 저는 그 이상의 죄를 범한게 분명합니다.
[오르공] (아들에게) 이런 나쁜 놈!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여서 이 분의 티없이 맑은 덕을 해치려는 거냐?
[다미스] 뭐라구요? 이 위선자의 겉치레뿐인 다정함에 넘어가서 사실을 부정하시려고…….
[오르공] 닥쳐! 몹쓸 놈 같으니.
[따르뛰프] 아닙니다. 말하게 내버려 두십시오. 그를 나무라시는 건 잘못된 일입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이 좋습니다. 어찌 그런 일로 저의 편을 드시려 하십니까? 제가 어떤 일을 저지를지 어떻게 아십니까? 저의 겉치레만을 믿고 계시는 건가요? 겉치레만을 보고 저를 보다 나은 인간으로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당신은 제 외관에 속고 있는 겁니다. 불행히도 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모두들 저를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전 아무런 가치 없는 인간입니다. (다미스에게) 그렇습니다. 친애하는 자제분이여! 뭐라고든 말하시오. 나를 배반자, 파렴치한, 미친놈, 도둑놈, 살인자로 취급하시오. 그보다 더한 저주받을 이름을 내게 실컷 퍼부으시오. 나에게 다른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인간이니까요. 나는 나의 생애의 죄에 어울리는 수치로서 이렇게 무릎을 꿇고 이 모욕을 받아들일까 합니다.
[오르공] (따르뛰프에게) 형제여, 그건 지나친 말씀입니다. (아들에게) 너는 아무렇지도 않느냐, 이 배반자 같으니!
[따르뛰프] 형제여. 신의 이름에 맹세코 화내지 말아 주시오. 아드님이 저로 인해서 할퀸 상처라도 맏게 된다면……. 전 그 어떠한 고통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오르공] (아들에게) 배은망덕한 놈!
[따르뛰프]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필요하다면 제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오르공] (따르뛰프를 쫓아 무픞을 꿇고 그를 껴안으며) 오! 어찌 그런 겸손을? (그러고는 아들에게) 이놈아. 봐라! 이 분이 얼마나 너그러우신가를……
[다미스] 그럼…….
[오르공] 조용히 해!
[다미스] 뭐라구요? 나는……
[오르공] 닥치라고 말했다! 네가 왜 이분을 나쁘게 말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너희들은 모두 이 분을 미워하고 있어. 오늘 난 더욱 분명히 알았다. 아내도, 자식들로 하인들까지도 그를 미워하고 날뛰고 있음을 말이야. 모두가 이 믿음 깊은 분을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 뻔뻔스럽게 갖은 수단을 다 쓰고 있지. 그러나 너희들이 이 분을 쫓아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나는 이 분을 더 붙들 테다. 그리고 온 가족의 교만한 콧대를 꺾어 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서둘러 이 분에게 딸을 시집보내겠다.
[다미스] 강제로 꼭 그래야만 하나요?
[오르공] 그렇다, 이놈아! 오늘 밤 당장에. 너희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흥! 너희들 모두를 상대로 알려 주겠다. 이 집의 가장은 나며 나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자, 아까 한 말을 취소해라, 건달 같은 놈! 이 분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란 말이다.
[다미스] 누가요. 내가요? 이 불한당 사기꾼한테……
[오르공] 이 자식! 나에게 반항하고 이 분에게 감히 모욕을 줘? 회초리, 회초리를 가져와! (따르뛰프에게) 말리지 마시오. (아들에게) 썩 여기서 나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이 집에 들어올 생각일랑 마!
[다미스] 네, 나가지요. 그러나……
[오르공] 어서 썩 꺼져. 오늘로서 네놈의 상속권은 사라졌다. 대신 나의 저주를 주도록 하지.
제 7장
오르공, 따르뛰프
[오르공] 성인 같은 분을 모욕하다니!
[따르뛰프] (방백) 오, 하늘이여!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을 그를 위해 용서하소서! (오르공에게) 형제처럼 생각하는 당신에게 저를 나쁘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얼마나 제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실 겁니다……
[오르공] 아, 그럴 수가!
[따르뛰프] 그 배은망덕한 행동을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낍니다. …….두렵기 짝이 없는……가슴은 답답하고 말이 안 나오고,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오르공]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쫓아낸 문쪽으로 달려가서) 악당! 이 손으로 너를 갈겨 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구나. 이 자리에서 당장 뻗게 해주었어야 하는 건데! (따르뛰프에게) 기운을 차리시고 울분을 참으십시오.
[따르뛰프] 그만둡시다. 불쾌한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기로 하죠. 저는 이 가정에 아마도 크나큰 분재을 가져온 듯합니다. 제가 이 집을 더나야 할 것 같습니다.
[오르공] 뭐라구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따르뛰프] 모두가 저를 미워합니다. 저의 변함없는 마음을 당신으로 하여금 의심케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르공] 상관없습니다! 제가 어디 그들 말을 믿기나 합니까?
[따르뛰프] 그들의 충고는 아마 계속될 겁니다. 그러한 고자질을 오늘은 물리치셨지만 다음에도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다고 볼 수 없잖겠습니까?
[오르공] 아니오, 절대로.
[따르뛰프] 아 형제여! 여자란 남편의 마음을 쉽사리 사로잡을 수 있는 법.
[오르공] 아닙니다. 아니에요.
[따르뛰프] 자. 어서 나를 여기서 나가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저를 공격할 이유도 없어질 테니까요.
[오르공] 나의 생사에 관계되는 일, 제발 계속 머물러 주십시오.
[따르뛰프] 좋습니다. 제가 괴로움을 당해야 하겠지만, 당신이 그렇게 원하시니……
[오르공] 아!
[따르뛰프] 네, 알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바 아닙니다. 명예란 중상받기 쉬운 것, 당신에 대한 우정으로 저는 사람들의 쑥덕공론과 수근거림을 경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인을 피해서 다시는…….
[오르공] 아니오, 누가 뭐라고 하든 아내와는 가까이 지내주시오. 사람들의 화를 돋구는 건 내 가장 큰 기쁨, 언제나 당신이 아내와 같이 있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뿐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만을 상속인으로 정할 작정이오. 모두를 더욱 놀래켜 주기 위해서, 나는 이길로 가서 정식 수속을 밟고 내 재산을 몽땅 당신에게 드리겠소. 내가 사위로 선택한 친절하고 정직한 친구는 나에게는 아들보다도 또 아내보다도, 친척보다도 훨씬 더 소중하니까. 내 제의를 받아 주시겠소?
[끌레앙뜨] 네, 세상이 그 소문으로 떠들썩합니다. 이런 소문이 퍼지는 것은 당신에게 켤코 명예롭지 못합니다. 마침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간단히 내 의견을 말씀드리죠. 나는 사람들의 소문을 낱낱이 들출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이 문제를 나쁘게 해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미스의 행동은 옳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당신이 부당한 비난을 받았다고 하더라고 그의 행동을 용서해 주고 복수의 마음은 깨끗이 털어 버리는 게 기독교도다운 행동이 아닐까요? 그 같은 다툼으로 아들이 그 부친의 집에서 쫓겨나는 걸 묵과해도 괜찮을까요? 다시 한번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어른 아니 할 것 없이 그 소문을 듣고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 말을 믿고 일을 순탄하게 처리해서 파국으로 몰고 가는 걸 피하십시오. 당신의 울화는 하나님께 바치고 부자를 화해시키도록 해야만 합니다.
[따르뛰프] 아! 그럴 수만 있다면 저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도 그 청년을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전 모든 걸 용서했습니다. 무엇 하나 책망할 생각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 그와는 다릅니다. 그 청년이 되돌아오면 제가 나가야 합니다. 그런 비길 데 없는 모욕을 당한 후 우리가 서로 상대를 한다면 오히려 더 나쁜 소문이 날 거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모든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 거라는 건 뻔합니다. 내가 요령있게 처신을 한다고 사람들은 나에게 덮어씌울 테니까요. 어디서나 이렇게 말할 겁니다. 스스로 꿀리는 구석이 있으니까 자기를 비난하는 자에게 친절한 체한다든가, 상대가 두려우니까 가까이 두고 관대한 태도를 취하며 입을 봉하게 하고 있다든가…….
[끌레앙뜨] 아주 제대로 된 변명을 하시는군요. 당신의 이슈는 꾸며진 거라는 게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나는군요. 하늘의 뜻을 거기다 끌어댈 것까진 없지 않습니까? 죄인을 벌하는 데 신이 우리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겁니까? 천벌을 내리는 건 신의 뜻에 맡기고 모욕을 용서해 주는 신의 가르침만을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지상의 명령을 따르는 데 인간의 판단 따위를 고려할 필요는 없지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으로 선행을 베풀 수 있는 영광을 놓친단 말입니까? 안 됩니다. 언제나 하늘이 명하는 대로 따르고 다른 생각으로 정신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따르뛰프]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제 마음은 벌써 그를 용서하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하늘이 지시하는 바대로 실천한 거죠. 그러나 오늘처럼 모욕을 받고 말썽이 생겨서는 제가 그와 같은 집에서 사는 걸 하늘도 명령하지 않습니다.
[끌레앙뜨] 그럼 신은 이렇게 명령하나요? 순전히 부친의 변덕스러운 생각에 귀를 기울이라고요? 법률상 당신에게는 전혀 주장할 권리가 없는 재산을 받으라고 명령하나요?
[따르뛰프] 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물욕에 눈이 어두워 그런 행동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을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은 저에게는 아무런 매력이 없습니다.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는 그 찬란한 빛에도 내 마음은 결코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 부친이 주겠다는 재산을 받아들일 결심을 한 것은, 사실을 말하자면, 그 전부가 악한 사람들 손에 들어가지 않을까 염려해서이빈다. 그것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죄 많은 용도에 그걸 쓰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신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는 사용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끌레앙뜨] 하하! 그런 지나친 염려는 제발 거두시죠. 정당한 상속인으로부터 항의가 없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부질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상속인이 재산을 받고 그로 인해 위험을 겪도록 내버려 둬야죠. 재산을 가로챘다고 비난을 받느니보다는 본인에게 멋대로 쓰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당신이 그 부친의 제의를 태연히 받아들인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 참된 신앙에는 정당한 상속인의 재산을 가로채라는 격언이라도 있나요? 가령 또 하늘의 뜻에 의해 도저히 다미스와 같이 살 수 없다면 분별있는 사람으로서 당신은 점잖게 여길 나가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 집 자식이 당신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는데 염치없이 바라보고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의 성실성을 보여 주는 기회로……
[따르뛰프] 마침 세 시가 되었군요. 위에 올라가서 경건한 의무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죄송하지만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끌레앙뜨] (혼자서) 아!
제 2장
엘미르, 마리안느, 도린느, 끌레앙뜨
[도린느] (끌레앙뜨에게) 부탁입니다. 아가씨를 위해 저희와 같이 도와주세요. 아가씬 너무나 엄청난 괴로움을 당하고 계세요. 주인님이 오늘 밤에라도 식을 올리겠다고 말씀하셔서 절망하고 있어요. 곧 주인님께서 오실 거예요.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그 불행한 계획을 힘으로든 아니면 계략을 써서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깨뜨려 버려야 해요. 다같이 힘을 합쳐야 해요.
제 3장
오르공, 엘미르, 마리안느, 끌레앙뜨, 도린느.
[오르공] 여~ 모두들 함께있어서 마침 잘 됐군. (마리안느에게) 이 계약서를 보면 넌 틀림없이 좋아할 거다. 그 뜻은 벌써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마리안느] (무릎을 꿇고) 아버님, 저의 괴로움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버님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걸고 부탁드리오니 어버이의 권리를 그렇게 휘두르지 말아 주십시오. 아버님 뜻에는 언제나 순종하겠으나 이번만은 용서해 주십시오.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되면 아버님의 자식으로 태어난 걸 저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버님께 받은 이 목숨을 불행하게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가진 아름다운 꿈이 깨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갈 수 없을지라도, 제발 소원입니다. 이렇게 무릎 꿇고 부탁드립니다. 가장 싫어하는 그 사람에게 가라고 말하지느 말아 주십시오. 아버님의 권위로서 저를 절망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오르공] (순간적으로 측은하게 여겨지는 듯) 자, 마음을 굳게 먹어야지. 정에 끌려서는 안 돼.
[마리안느] 아버님이 그 분에게 아무리 친절하셔도 괜찮아요. 얼마든지 친절하게 하셔도 되고, 아버님 재산을 모두 드려도 좋습니다. 그게 부족하시면 제 몫의 재산까지도 주십시오. 기꺼이 동의하겠사오니 좋으실 대로 하세요. 하지만 제 몸만은 그에게 주지 마십시오. 차라리 수도원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 엄격한 규을을 지키면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슬픈 나날을 보내겠습니다.
[오르공] 음! 아버지가 사랑의 불길을 가로막으면 대부분 그렇게들 말하지. 수녀가 되겠다는 둥……. 일어나라! 네가 싫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수업을 쌓을 기회가 되는 거야. 이결혼으로 속세의 욕망을 버리도록 해라. 그리고 더 이상 내 골치를 썩이지 않도록 해.
[도린느] 뭐라구요? 대체…….
[오르공] 넌 잠자코 있어. 왠 참견이냐? 한 마디도 뻥끗해서는 안 된다. 알았지?
[끌레앙뜨] 충고라 해서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하면……..
[오르공] 처남! 처남의 충고는 대단하죠. 앞뒤가 꼭 들어맞으며, 나 역시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그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고 섭섭하게 생각진 마십시오.
[엘미르] (남편에게) 이런 걸 다 보고 나니 할말이 없군요. 당신이 맹목적인 데는 정말 감탄해 마지 않아요. 오늘 있었던 일 같은 것을 부정하시다니, 그 사람한테 푹 빠지셔서 눈이 어두워지신 거예요.
[오르공] 옳은 말이오. 나느 외관을 믿어요. 당신이 내 멍텅구리 아들을 귀여해 주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놈은 그 가엾은 분에게 수작을 꾸미려 했고 당신은 그 음모를 고백할까봐 두려웠던 거지. 그걸 믿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너무 태연했어. 더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면 또 몰라.
[엘미르] 단순히 한 사내에게 사랑의 고백을 들은 것으로 여인의 명예에 금이 간 것처럼 떠들어대야 하나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욕설을 퍼부으며 대응해야 되나요? 저는 그런 이야기 따위는 가볍게 웃음으로 받아 넘깁니다. 그런 일로 소란을 떠는 건 싫어요. 부드럽게 정숙한 여인임을 표시하면 되는 거죠. 손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정절을 지키려는, 한마디만 하면 금방이라도 덤벼드는 그 억센 열녀들과는 다르니까요. 그런 정숙은 질색이에요! 저는 그런 거친 도덕을 원치 않아요. 조용히 차갑게 거절한다고 해서 사내의 유혹을 거절하는 힘이 약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오르공] 하여간 그 이야기라면 알고 있소. 어쨌든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엘미르] 정말 답답하신 데 다시 한번 감탄합니다. 하지만 다미스가 한 말이 정말이라는 걸 보여 드리면 의심 많은 당신은 뭐라고 하시겠어요?
[오르공] 보여 준다고?
[엘미르] 네.
[오르공] 말 같지 않은 소리!
[엘미르] 아니요! 분명히 백일하에 드러내 보여 드린다면요?
[오르공] 터무니없는 소리!
[엘미르] 기막힌 양반! 하여간 대답이나 하세요. 내 말을 믿어 달라고 하진 않겠어요. 다만, 가령 어디나 당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모든 걸 분명하게 당신한테 보여 드리고 들려 드린다면 당신은 그 당신의 성인에 대해서 뭐라고 하시겠냐는 거예요?
[오르공] 그런 경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
[엘미르] 믿음이 대단하시군요. 내 말까지도 중상모략으로 생각하시다니, 너무하십니다. 당장에 보여 드리도록 하죠. 모두가 말하는 그의 본 모습을 실제로 목격시켜 드리겠어요.
[오르공] 좋아. 당신 말을 믿어 보기로 하지. 당신이 어떻게 약속을 지키는가 어디 당신 솜씨를 보기로 하겠어.
[엘미르] (도린느에게) 그 분을 이리 오시도록 해라.
[도린느] (엘미르에게) 아주 간사한 자라서 꼬리를 잡기가 그리 쉽지 않을지도 몰라요.
[엘메르] (도린느에게) 아니야 사랑하는 여자한테는 쉽사리 속는 법. 그리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까 스스로 속아 넘어가게 돼 있어. 어서 가서 아래층으로 내려오시라고 해라. (그리고는 끌레앙뜨와 마리안느에게) 저리들 나가세요.
제 4장
엘미르, 오르공
[엘미르] 이 테이블을 이리로 가져다 놓고 당신은 그 밑에 들어가 계세요.
[오르공] 뭐라구?
[엘미르] 잘 숨으셔야 해요.
[오르공] 왜, 이 테이블 밑에?
[엘미르] 아! 저에게 맡기세요. 계획이 있으니까요. 두고 보세요. 이 밑으로 들어가세요. 들어가신 후에는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세요.
[오르공] 지나치게 당신 말을 따르는 것 같지만 당신 계획이 어떻게 되나 보기로 하지.
[엘미르] 불평하실 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테이블 밑에 있는 남편에게) 하여간 지금부터 제가 약간 이상한 짓을 할지도 모르니 절대로 노하시면 안 돼요. 제가 뭐라고 말하더라도 용서해 주셔야 합니다. 약속드린 대로 당신에게 확인시키기 위한 거니까요.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습니다. 달콤한 말로 그 위선자의 가면은 벗기고 사랑의 불길에 부채질을 해서 파렴치한 욕망을 드러나게 하고 멋대로 경솔하게 굴도록 하겠어요. 제가 그 자의 사랑의 설득에 넘어가는 척하는 것도 단지 당신을 위해 그 자를 꼼짝 못하게 하려는 거예요. 당신이 항복하시면 곧 연극을 중지하겠습니다. 어디까지 갈지는 당신이 원하시는 바에 달렸어요. 그 정도로 됐다 싶으시면 그 자의 당치않은 연정을 가로막고 아내를 구하는 것이 당신의 역할이에요. 어쨌든 당신의 미망을 깨우치면 되는 거니까, 필요 이상으로 저를 위험에 버려 두진 마세요. 모두가 당신을 위한 것, 당신 뜻대로 하세요. 아, 그가 오는군요. 가만히 숨어 계세요.
제 5장
따르뛰프, 엘미르, 오르공(테이블 밑에 숨어 있다)
[따르뛰프] 제게 말씀하실 게 있으시다고요?
[엘미르] 네. 당신에게 은밀히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하지만 말씀드리기 전에 그 문을 닫다 주세요. 누군가 엿듣지 않는지 잘 살펴 주시고요. (따르뛰프, 문을 닫고 돌아온다) 아까 같은 일이 다시 있으면 곤란하니까요. 그렇게 놀란 적은 처음이에요. 다미스가 나서는 바람에 정말 겁이 났어요. 하지만 보셨던 바와 같이 그 애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계획을 포기시키는 데 무척 힘이 들었어요. 저도 무척이나 당황해서 그 애의 말을 부정하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하늘의 도우심으로 모든 게 다 잘 되어 이젠 아무런 걱정도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에 대한 존경이 뇌우를 가라앉혔고 남편은 당신에게 한치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아요. 나쁜 소문이 쫙 퍼져도 개의치 않아요. 그리고 우리에게 언제나 같이 있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처럼 당신과 단둘이 있어도 비난받을 염려가 없지요. 그리고 이처럼 당신에게 마음을 드러내 보일 수도 있고요. 당신의 정열에 대답하는 것이 너무 빠를지도 모르지만요.
[따르뛰프] 그 말씀, 좀 이해하기가 힘든데요. 부인. 아까는 다른 투로 말씀하셨는데…….
[엘미르] 어마나! 아까 그처럼 거절한 것에 화를 내시다니, 당신은 여자의 마음을 너무나 모르시는군요! 여자가 미지근한 저항밖에 하지 않았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시는군요! 그런 경우, 여자의 수치심은 언제나 남자가 바치는 애정에 거부의 뜻을 표하는 법이에요. 사랑의 포로가 된 것을 알아도 그걸 고백하는 건 언제나 부끄러운 거니까요. 처음엔 우선 거절한다. 그러나 그때의 상황으로 마음은 움직이고 있다. 체면을 지키기 위해 다음에 없는 말을 한다. 이러한 거절은 모든 것을 약속한 것이라는 걸 알려 주는 거예요. 이런 말을 털어놓고 말씀드리다니 여자의 수치심을 소흘히 하는 것 같습니다만, 말을 꺼낸 이상 다 말씀드리죠. 당신의 사랑의 고백이 제 마음에 기쁨을 주지 않았다면 그처럼 다미스를 말리려 했을까요? 당신의 사랑의 말에 그처럼 가슴을 떨며 귀를 기울였을까요? 아까 보신 바와 같은 태도를 취했을까요? 남편이 딸과 당신의 혼담을 꺼냈을 때 당신이 거절하도록 부탁한 것도 당신을 생각하기 때문이었으며, 이 혼담이 이루어지면 겨우 독점할 수 있었던 당신의 마음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그 괴로움을 당신이 알아 달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따르뛰프] 부인!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는 건 분명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그 꿀 같은 달콤함은 저의 오관에 깊이 스며들어 처음으로 맛보는 감미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부인의 마음에 들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행복은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부인의 마음을 알고 저는 한없는 기쁨을 감출 길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진정 기쁨에 젖기 전에 저는 약간의 의아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말씀은 저를 유혹하여 다 된 혼담을 깨뜨리려는 책략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터놓고 말씀드리자면 부인의 애정은 제가 바라는 것이지만, 그 애정의 표현이 어느 정도 말씀을 뒷받침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또한 제 마음을 황홀케 하는 부인의 애정에 대해 저의 마음에 확신을 심어 줄 때까지는 어떠한 다정한 말씀도 믿지 않으렵니다.
[엘미르] (남편의 주의를 끌기 위해 기침을 한다.) 어마나! 그렇게 서둘러서 애정의 밑바닥까지 드러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하는 것만도 저로서는 몹시 힘든 일이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끝까지 사랑의 표식을 보여드리지 않으면 만족하실 수 없다니요.
[따르뛰프] 행복할 자격이 없는 인간은 그런 건 별로 바라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은 말만으로 안심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영광에 넘친 운명도 언제 검은 그림자가 덮칠지 모르니까요. 그런 까닭에 믿기 전에 그걸 손에 넣기를 바라는 거죠. 저는 부인의 호의를 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무모한 행동이 가져온 행복을 의심하고, 부인이 실제로 저의 연정을 만족시켜 줄 때까지 전 아무것도 믿지 않겠습니다.
[엘미르] 정말이지. 당신의 사랑은 마치 폭군과도 같군요. 저는 마음이 심란해요! 남의 마음에 힘으로 군림해서 폭력으로 원하는 것을 가지려 하다니요. 정말로 당신에게 쫓기면 전 몸을 지킬 수 없어요. 숨을 돌이킬 겨를도 안 주실 테니까요. 그처럼 강인하게 다가와서 원하는 것을 가차없이 달라신다. 드러나는 약점을 이용해서 거침없이 구하신다, 그래도 괜찮은 걸까요?
[따르뛰프] 그러나 저의 찬사를 애정을 가진 눈으로 봐주신다면 어째서 확실한 증거를 보이려 하지 않으시나요?
[엘미르] 그러나 당신이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늘을 모독하지 않고 어떻게 당신이 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있겠어요
[따르뛰프] 저의 소원을 가로막는 것이 하늘의 뜻만이라면 그러한 장애물을 없애는 것은 내게는 쉬운 일입니다.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엘미르] 그러나 저는 하늘의 심판이 더없이 무서워요!
[따르뛰프] 그렇다면 그 우매한 공포를 덜어 드리죠. 부인! 저는 불안을 없애는 기술을 알고 있습니다. 신이 어떤 종류의 쾌락을 금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과 절충을 한다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양심의 사슬을 늦추고 나쁜 행위를 의도의 순수함으로써 수정하는 학문이 있거든요. 부인, 그 비밀을 가르쳐 드리죠. 당신은 내 말대로 하면 됩니다. 제 소원을 이루게 해주십시오. 두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부인께 폐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엘미르, 더욱 크게 기침을 한다.) 기침을 몹시 하십니다. 부인.
[엘미르] 네 몹시 괴로워요.
[따르뛰프] (엘미르에게 나팔처럼 길게 말은 종이봉투를 주며) 이 감초즙을 좀 드시면?
[엘미르] 끈질긴 감기예요. 어떤 즙을 먹어도 나을 것 같지 않아요.
[따르뛰프] 괴로우시겠습니다.
[엘미르] 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요.
[따르뛰프] 요컨대 부인의 불안을 해소시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여기서는 완전히 비밀이 보장되어 있죠. 나쁜 짓이 나쁜 짓으로 되는 것은 사람들이 떠들어대기 때문이고 아무도 모르게 범하는 죄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엘미르] (또다시 기침을 하고 테이블을 두들긴다) 마침내 말씀에 따라 모든 걸 허용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만족하시지 않을 테고 손을 드시지도 않을 테니까요. 분명 이런 일은 잘못된 짓이에요. 여자의 도리를 넘어서는 것도 제 탓이 아닙니다. 그러나 할 수없이 거기까기 가기 않을 수 없게 만들며, 남의 말을 믿지 않고 보다 분명한 증거를 대라고 말씀하시니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마음을 정하고 만족하시도록 해드리죠. 제가 이렇게 승낙하는 게 잘못이라면 그건 억지로 시킨 사람의 잘못이에요. 물론 제 잘못은 아니죠.
[따르뛰프] 물론입니다. 부인!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엘미르] 잠깐, 문을 열고 혹시 낭하에 남편이 있지 않은지 살펴 주세요.
[따르뛰프] 주인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실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들끼리니까 말입니다만, 그는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인간입니다. 우리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 영광으로 생각할 겁니다. 게다가 저는 무얼봐도 믿지 않도록 그를 다스려 놓았으니까요.
[엘미르] 하여간 잠깐 밖에 나가셔서 여기저기 잘 살펴 봐주세요.
제 6장
오르공, 엘미르
[오르공] (테이블 밑에서 나오며) 허, 이럴 수가! 구역질 나는 자식이야! 기가 막혀서 정신이 다 얼떨떨하군.
[엘미르] 어마나! 벌써 나오세요? 안 돼요. 경솔하시군요. 다시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세요. 아직 나오기에는 일러요. 끝까지 기다렸다가 확실한 것을 보셔야죠. 단순한 추측을 그대로 믿으시면 안 돼요.
[오르공] 아니야, 지옥에도 저런 악질은 없을 거야.
[엘미르] 어머나! 너무 경솔하게 믿으시면 안 돼요. 손을 드시기 전에 확신을 가지셔야죠. 너무 서둘러 착각을 하지 않으시도록 말이에요. (남편을 자신의 뒤에 숨긴다.)
제 7장
따르뛰프, 엘미르, 오르공
[따르뛰프] (오르공을 보지 못하고) 부인, 만사 원하시는 대로입니다. 온 집안을 샅샅이 살폈는데 아무도 없습니다. 참으로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따르뛰프, 엘미르를 껴안으려고 두 손을 벌리고 앞으로 다가서자 엘미르가 물러선다. 그 순간 따르뛰프가 오르공을 본다.)
[오르공] (따르뛰프를 막아서며) 덤비지 마! 색정에 너무 끌리면 못써. 너무 흥분하지 말란 말이야. 군자연하고 나를 속이려고? 탐욕에 눈이 어두워 영혼을 팔다니! 딸과의 결혼에다가 아내까지 탐내! 벌써 오래 전부터 그런 짓을 제정신으로 한다고는 믿기 어려웠어. 어조가 달라지리라고 생각했었거든. 이만큼 증거를 보여 주었으면 충분해. 더 이상은 사양하겠어.
[엘미르] (따르뛰프에게) 모두 마음에 없는 일이었어요. 단지 당신한테 그런 행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르뛰프] (오르공에게) 뭐요! 당신은 설마…….
[오르공] 자, 여러 말 마시오. 그냥 깨끗이 나가 주면 되는 거요.
[따르뛰프] 내 계획은……
[오르공] 그런 넋두리도 이젠 먹혀 들지 않아. 당장 나가시오!
[따르뛰프] 나가야 할 사람은 당신이야. 마치 주인인 듯 말하고 있는 당신이라구. 이 집은 내 집이야. 알고 있을 텐데. 내게 싸움을 걸려고 그런 비겁한 수단을 썼겠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내가 아니라구, 나에게 모욕을 주려는 모양이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지. 그러한 협잡을 꾸민 것에 대해 벌하고 아무 소리 못하게 해줄 테니까. 하늘을 욕되게 했으니 천벌이 내릴 거야. 나를 쫓아내겠다고 말한 자들은 뉘우치게 해주지.
제 8장
엘미르, 오르공
[엘미르] 대체 무슨 소리죠? 무슨 말이에요?
[오르공] 이거 야단났는데, 웃을 경황이 없어.
[엘미르] 뭐예요?
[오르공] 저 자 말을 듣고 보니 내게도 잘못이 있었어. 재산 증여 같은 건 하는 게 아니었는데.
[엘미르] 재산 증여!……
[오르공] 그래. 그건 이미 끝난 이링야. 그러나 그 밖에 또 걱정되는 것이 있어.
[엘미르] 또 뭐요?
[오르공] 곧 알게 될 거요. 그보다도 그 상자가 위층에 있는지 보고 와야겠어.
제 5막
제 1장
오르공, 끌레앙뜨
[끌레앙뜨] 어디를 그렇게 달려가나?
[오르공] 아이고, 모르겠소.
[끌레앙뜨] 모두들 상의해서 이 사건의 대책을 세우는 게 선결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오르공] 그 상자 때문에 미칠 지경이오. 무엇보다도 그게 날 괴롭혀.
[끌레앙뜨] 그럼 아주 중요한 비밀이라도?
[오르공] 그 가엾은 친구 알가스가 극비라고 하면서 직접 내게 맡기고간 거요. 달아나기 전에 나를 믿고 맡기고 간 거죠. 그의 생명과 재산이 걸려 있는 중요한 서류라고만 했어요.
[끌레앙뜨] 아니, 어째서 그걸 남에게 맡겼나?
[오르공] 양심상의 이유로 그랬죠. 나는 그 위선자에게 곧바로 상의했었죠. 그런데 그 자가 말하는 게 모두 맞는 것 같아서 상자를 맡아 달라고 주었지요. 그러면 가택 수객이라도 받았을 때, 맡고 있지 않다고 잡아뗄 수가 있고, 진실에 어긋나는 서약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끌레앙뜨] 아무래도 형세가 불리한 것 같군. 재산을 증여하고, 게다가 그런 비밀까지 털어놓았으니, 솔직히 매부의 행동은 경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네, 그런 약점을 잡혔으니 얼마나 당하게 될지 알게 뭔가. 상대의 입장은 그만큼 유리하다고 할 수 있으니, 그걸 생각 못하다니 정말로 경솔했어. 좀더 온건한 방법을 찾았어야 하는 건데.
[오르공] 이런 참! 그처럼 감동적인 믿음으로 가득 찬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그처럼 이중적인 마음과 그렇듯 사악한 정신을 숨기고 있을 줄이야! 내가 일전 한 푼 없는 걸인과 다름없는 자기를 돌봐줬는데……. 이젠 알았어, 성인군자라면 이제는 질색이야. 이젠 그럼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려. 악마보다도 더 나쁜 인간이 되어서 본때를 보여 줘야겠어.
[끌레앙뜨] 아 이런! 또 그렇게 흥분하면 안 되지. 무슨 일이건 차분하게는 해결 못하는군. 올바른 이치를 따질 줄은 모르고 언제나 극단에서 극단으로 달린다니까. 이보게 매부, 자기 잘못을 깨닫고 거짓 신앙에 속았던 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 잘못을 고치기 위해 보다 큰 잘못을 저지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단 한 사람의 천한 불한당과 모든 성인군자를 혼돈할 것은 없다 이 말이지. 안 그런가? 한 사람의 악당이 엄숙한 신앙을 그럴싸하게 내세우고 대담하게 매부를 속였다고 해서 누구나 그와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네. 자넨 오늘날에는 진정한 신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나? 그런 멍청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신앙자들에게 맡기고, 미덕과 그 가장을 식별하고, 너무 서둘러서 존경심을 잃지 않도록 해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중요의 길을 택해야 하네. 협잡에 걸리지 않도록 될 수 있는 한 조심해야 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신앙을 욕해서도 안 되는 거라네. 어느 한쪽 극단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위선의 신자에 걸리는 편이 죄가 가볍다고 하겠지.
제 2장
다미스, 오르공, 끌레앙뜨
[다미스] 어떻게 된 겁니까? 아버님? 정말이에요? 그 악당이 아버님을 협박하고 있다는 게! 아무리 은혜를 입어도 그런 자는 곧 잊어버리게 마련이에요. 뻔뻔스럽기 이를 데 없는 그 교활한 악당은 아버님의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는 거군요?
[오르공] 그렇다. 아들아. 그래서 골치가 아프구나.
[다미스]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 자의 양쪽 귀를 잘라 버리겠습니다. 그런 오만불손을 묵과할 수는 없잖습니까? 단 한 방에 아버님을 그자로부터 해방시켜 드리겠습니다. 그 자를 때려 눕혀서 사건을 해결해 버리겠습니다.
[끌레앙뜨] 젊은이로서 그렇게 말하는 건 당연하지. 하지만 지나친 흥분은 삼가야 한다. 우리는 왕의 통치하에 있고 폭력을 휘둘러서 덕 볼게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단 말이야.
제 3장
빼르넬르 부인, 마리안느, 엘미르, 도린느, 다미스, 오르공, 끌레앙뜨
[빼르넬르 부인] 어떻게 된 거냐?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무서운 소리들 들었는데.
[오르공] 정말 못 볼 장면을 이 눈으로 봐버린 겁니다. 제 친절이 어떤 앙갚음을 받았는지는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저는 찢어지게 가난한 자를 동정해서 제 집에 받아들였습니다. 집에 머물게 하고 형제처럼 대해 주었지요. 매일같이 여러 면으로 돌봐주고 저의 모든 재산도 그에게 주었지요. 그런데 그 배반자, 불한당은 그 사이 아내를 유혹하려고 흉측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겁니다. 더욱이 그 비열한 계획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제가 베푼 것으로 저를 협박하고 저의 경솔한 호희를 역이용해서 저를 파멸시키려 들고 있습니다. 이 집도 벌써 양도받았다고 저를 내쫓고 제가 그를 받아들였을 때와 같은 비참한 입장에 저를 떨어뜨리려는 겁니다.
[도린느] 잘됐군요!
[빼르넬르 부인] 아들아, 그 분이 그처럼 흉측한 짓을 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구나.
[오르공] 뭐라구요?
[빼르넬르 부인] 덕망 높은 분은 언제나 시기를 받는 법
[오르공] 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는 겁니까, 어머님?
[빼르넬르 부인] 이 집에는 정상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모두가 그 분을 증오하고 있는 건 뻔한 사실 아니냐?
[오르공] 그 증오하고 어머님 말씀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빼르넬르 부인] 네가 어렸을 때 몇 번이고 말해 주지 않았니. 덕이 높은 분은 언제나 세상에서 박해를 받으며, 시기하는 자는 죽어도 시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오르공] 그러나 그 말씀과 오늘의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냐구요?
[빼르넬르 부인] 그 분에 관해서 모두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지어냈을 거라는 거지.
[오르공] 제가 직접 봤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빼르넬르 부인] 남의 욕을 하는 자들이 얼마나 교활한지 알아야지.
[오르공] 정말 기가 차군요. 어머님, 이 눈으로 그 배짱 좋은 죄악을 모두 봤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빼르넬르 부인] 말이란 언제나 독버섯처럼 퍼지게 마련이야.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오르공]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제 눈으로 봤다고 말씀드렸어요. 바로 이 눈으로요. 제가 봤다면 본 거예요. 몇 번 말씀드려야 아시겠어요. 목이 찢어지도록 외쳐야 합니까?
[빼르넬르 부인] 이런 참! 흔히 겉치레는 속과 다른 거야. 본 것만 가지고 판단하는 건 잘못인지 모른다.
[오르공] 어휴 답답해!
[빼르넬르 부인] 인간의 본성은 의심이 많은 거다. 좋은 일이 나쁜 일로 해석되는 예도 많아.
[오르공] 아내를 포옹하려고 했는데, 그걸 자비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구요?
[빼르넬르 부인] 사람을 비난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지. 넌 확실한 걸 볼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다.
[오르공] 뭐요! 더 확실한 걸 봐요? 그럼 제가 좀더 기다리고 있었어야 했나요? 그 자가 내 눈앞에서……. 그런 멍청한 소릭 어디 있습니까!
[빼르넬르 부인] 하여간 그 분의 영혼은 맑은 신앙으로 가득 차 있다. 모두들 말하는 그런 짓을 했다고는 나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어.
[오르공] 정말 상대가 어머니가 아니라면 화가 치밀어서 무슨 소리를 했을 지도 모르겠어요.
[도린느] (오르공에게) 인과응보는 돌고 도는 법, 주인님께서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으셨으니까 지금에 와서는 주인님께서 말씀하시는 걸 사람들이 믿어 주지 않지요.
[끌레앙뜨]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 사기꾼이 고소를 할지 모르는데 우물쭈물하고 있을 겨를이 없어요.
[다미스] 네! 그렇게까지 뻔뻔스러울 수 있을까요?
[엘미르] 제 생각으로는 그런 고소가 받아들여지리라고는 생가되지 않아요. 그 자의 배은망덕한 행위가 너무나도 훤히 드러나 보이는데요.
[끌레앙뜨] (오르공에게) 그렇게만 생각할 수도 없네. 교묘히 꾸며서 올가미를 씌울지도 모르니까. 그런 음모에 걸려 들면 쉽게 벗어날 수없어.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만큼 약점을 잡혔으면 그렇게까지 일을 밀고 가지 않았어야 했어.
[오르공] 그건 그렇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합니까? 그 배반자의 교만한 꼴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걸요.
[끌레앙뜨] 정말이지 매부와 그 자 두 사람이 겉으로만으라도 좋으니 화해를 했으면 좋으련만!
[엘미르] 그 자가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걸 알았다면 이런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을 텐데요. 그리고…….
[오르공] (르와이얄 씨가 들어오는 걸 보고 도린느에게) 저 사람이 뭣 하러 왔지? 어서 가서 알아보아라. 이렇게 되면 누가 찾아 올지 알 게 뭐야!
[오르공] (작은 목소리로 끌레앙뜨에게) 이렇게 부드럽게 나오는 걸 보니 내 생각이 틀림없어요. 화해의 전조 같은 거랄까.
[르와이얄] 댁의 모든 집안과는 언제나 친근했습니다. 게다가 부친께서는 절 많이 돌봐주셨었죠.
[오르공] 이거 참 부끄럽기 이를 때 없습니다만, 댁이 누구신지 성함도 모릅니다.
[르와이얄] 저는 르와이얄이라고 하며 노르망디 태생으로 어쩌다 보니 권장(勸杖)을 들게 된 집달리올시다. 하나님의 덕택으로 사십 년 이래 다행히도 큰 사고 없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찾자 뵌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모종의 명령 통지서를 전해 드리기 위해서…….
[오르공] 뭐요! 당신은 여기에…….
[르와이얄] 선생, 흥분하지 마십시오. 단지 최고(催告)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은 명하는 대로 지체 없이 가구를 밖으로 내가고, 이 집을 타인에게 비워 주라는 명령으로서…….
[오르공] 내가 여기서 나가?
[르와이얄] 네 그렇습니다. 그래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집은 아시다시피 현재로서는 분명 그 선량한 따르뛰프 씨의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계약서에 의해 차후 그 분은 당신의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습니다. 계약서는 격식에 맞는 것으로서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을 겁니다.
[다미스] (르와이얄에게) 뻔뻔스럽군요. 놀라워요.
[르와이얄] (다미스에게) 당신에게 용건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르공을 가리키며) 용건은 이 분에게 있습니다. 이 분은 이치를 알고 상냥한 분이니까 선량한 시민의 의무가 뭔지를 잘 알 겁니다. 설마 공무 집행을 방해하거나 그러시진 않으시겠죠.
[오르공] 하지만…….
[르와이얄] (오르공에게) 네, 저는 압니다. 비록 백만의 재산이 문제라 해도 관청의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으실 거라는 걸요. 훌륭한 신자로서 제가 여기서 명령받은 임무를 수행하는 걸 용서해 주실 거라고 말입니다.
[다미스] 권장을 가진 집달리 선생! 그 검은 웃옷을 곤봉으로 한 대 갈겨 줄까.
[르와이얄] (오르공에게) 아드님 입을 닥치게 하든지, 나가도록 해주실까요? 조서를 꾸며서 당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 섭섭해 할 테니까요.
[도린느] (방백) 이 르와이얄이라는 사람, 이름과는 달리 속이 검은 사람인가봐!
[르와이얄] 저는 모든 선량한 분들에게 진정한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서류의 건을 맡은 것도 오로지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에게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집달리에게 걸리기라도 하시면 불리하실 거라 생각해서, 저만큼 호의를 갖지 않은 자를 만나면 얼마나 거칠게 나왔을지 모르니까요.
[오르공] 이 이상 더 난폭할 수가 있을까? 주인더러 자기 집에서 나가라고 하다니!
[르와이얄] 시간의 유예를 드리죠. 내일까지 잠정적으로 명령의 집행을 중지시키겠습니다. 다만 오늘 밤은 부하 열명을 데리고 이곳에 머무르러 오겠습니다. 사람들 시선을 끈다든가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형식상 주무시기 전에 문의 열쇠를 주셨으면 합니다. 안면을 방해하지 않도록, 또한 경우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러나 내일 날이 새면 가구 일체를 정리해서 여기를 나가실 준비를 하셔야만 합니다. 제 부하에게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물건을 밖으로 내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힘 센 자들을 골라 놨거든요. 어떻습니까, 이 이상 잘하기는 힘들죠? 제가 이처럼 관대한 조치를 취하고 있느니만큼 댁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의 직무 집행을 절대로 방해하지 않기를 말입니다.
[오르공] (방백) 이 자의 낯짝에 주먹을 한방 된통 먹일 수 있다면 가지고 있는 가장 근사한 백 루이 금화라도 당장 주겠어.
[끌레앙뜨] (작은 목소리로 오르공에게) 그만두게, 일을 그르치지 말고.
[다미스] 이 뻔뻔스러움이라니, 참을 수가 없군. 나가는 게 낫겠어.
[도린느] 르와이얄! 당신의 등은 이렇게 강인해 보이시는데, 곤봉을 한 두서너 대쯤 맞아도 괜찮으시겠어요?
[르와이얄] 그런 폭언은 충분히 벌을 받을 만한데, 여인에 대해서도 법의 제재가 있는 법이니까.
[끌레앙뜨] (르와이얄에게) 이쯤 하면 됐습니다. 충분해요. 빨리 그 서류를 주고 돌아가 주시오.
[르와이얄] 그럼 안녕히. 하늘이 당신들에게 기쁨을 내리시기를!
[오르공] 너와 너를 보낸 자에게 신의 벌이 내리기를.
제 5장
오르공, 끌레앙뜨, 마리안느, 엘미르, 빼르넬르 부인, 도린느, 다미스
[오르공] 어떻습니까, 어머님, 그럴 만하죠? 그 통지서를 보셨으니 그 밖의 일은 추측이 가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그 자의 배반을 어머님도 아셨나요?
[빼르넬로 부인] 너무나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오는구나. 마치 구름 위에서 떨어진 것 같아.
[도린느] 불평하실 것 없습니다. 그 사람을 나무라는 것도 잘못이구요. 그의 믿음 깊은 생각이 이걸로 분명해진 거니까요. 미덕이 이웃에의 사랑으로 열매를 맺은 거죠. 그 사람은 재산이 왕왕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걸 알기 때문에 순수한 자비심으로 주인 어른의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져가겠다는 거니까요.
[오르공] 닥쳐! 몇 번 말해야 알아듣겠어.
[끌레앙뜨] (오르공에게) 어서 대책을 강구해 보세.
[엘미르] 그 파렴치한 자의 정체를 세상에 알리는 게 어때요? 그렇게 되면 계약서의 효력도 없어질 거예요. 사람을 배반하고 그런 나쁜 짓을 하는 자라는 게 알려지면 세상 사람들도 그 자의 음모가 성공하는 걸 묵과하진 않을 것 아니겠어요.
제 6장
발레르, 오르공, 끌레앙뜨, 엘미르, 마리안느, 빼르넬로 부인, 다미스
[발레르] 대단히 안됐습니다만 나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사태가 급박해서 알려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저와 퍽 친한 친구가 국무상의 비밀을 어디서 교묘히 얻어서 알려왔습니다. 저와 선생님의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저를 위해 그런 거죠. 그의 말로는 선생님은 곧장 달아나실 결심을 하시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오랫동안 선생님을 속이고 재미를 보아 오던 사기꾼이 한 시간 가량 전에 국왕에게 고소를 해왔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욕하고 어떤 국사범의 중요한 상자를 국왕에게 내놓았답니다. 그 자의 말에 의하면 선생님은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 범인의 비밀을 은닉했다는 겁니다. 선생님이 그런 대단한 죄를 범하셨는지 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선생님께 어떤 명령이 내려지고, 그 명령을 집행하는 데는 바로 그 자가 적임이어서 선생님을 체포할 사람을 대동하고 이곳으로 온다는 겁니다.
[끌레앙뜨] 그 배반자! 자기의 권리로 무장하여, 눈독들여 놓은 매부의 재산을 가로챌 심산이로군.
[오르공] 인간이란 정말 몹쓸 동물이야!
[발레르] 한시라도 늦어지면 파멸입니다. 선생님을 모셔 갈 마차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도 천 루이 준비해 왔습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는 달아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을 안전한 장소에 모셔 가는 안내역은 제가 맡겠습니다. 어디까지라도 모시고 가겠습니다.
[오르공] 아! 자네의 친절한 말에 뭐라고 감사를 해야 할지. 언젠가 은혜를 갚을 수 있을 때가 오겠지. 이 고마운 마음씨에 보답할 수 있는 날이 하루속히 오길 하늘에 기도하겠네. 안녕히, 모두들 잘 있어요…….
[따르뛰프] (오르공을 붙들며) 좋습니다. 좋아, 그렇게 서둘러 달려갈 것 없습니다. 숙소를 찾는 데 뭐 그렇게 멀리까지 가실 필요가 없으니까요. 국왕의 명령으로 당신을 감옥으로 인도하죠.
[오르공] 배반자! 넌 그걸 마지막 무기로 감추고 있었구나. 이 악당! 그 손으로 나를 잡으려는 거야. 네 음모를 마무리 지으려는 거지.
[따르뛰프] 아무리 욕설을 퍼부어도 나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하늘을 위해 모든 걸 참는 것을 배웠으니까요.
[끌레앙뜨] 정말 대단하시군. 이게 선처라는 건가?
[다미스] 파렴치한 놈! 하늘을 농락하고도 괜찮을 것 같으냐?
[따르뛰프] 아무리 흥분하셔도 나는 까딱없습니다.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마리안느] 이런 짓을 하고 그것을 명예로 생각하는 거죠? 당신에게는 딱 어울리는 역할이에요.
[따르뛰프] 나는 관의 명령을 받고 여기에 온 겁니다. 어떤 역할도 영광으로 생각되지 않을 수 없죠.
[오르공] 이 배은망덕한 인간! 내 자비로운 손이 너를 빈곤의 밑바닥에서 구해 준 것을 잊었느냐?
[따르뛰프] 네,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걸 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국왕을 위하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임무입니다. 이 신성한 의무는 엄정하고 가혹한 것으로 마음속에 있는 감사의 마음을 억눌러 버리죠. 이처럼 강한 사슬에 묶이면 나는 친구도, 아내도, 친척도,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기꺼이 희생할 것입니다.
[엘미르] 사기꾼!
[도린느] 사람을 숭배하는 걸 방패로 그 뒤에 살짝 몸을 숨기다니, 정말 파렴치하군요.
[끌레앙뜨] 그러나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정열,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는 그 정열이 그처럼 훌륭한 거라면 왜 더 빨리 그걸 보여 주지 않았지? 매부의 아내에게 치근덕거리고 그 현장을 잡힐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지 않아? 매부는 체면상 당신을 쫓아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때가 되어서 매부를 고발할 생각을 한 것은 무엇 대문이지? 매부는 당신에게 전 재산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고소하고 나설 입장이 아니지만, 그 이야기는 그만두지. 그러나 이제 와서 매부를 죄인 취급할 거라면 왜 그로부터 재산을 받는 걸 동의했지?
[따르뛰프] (경리에게) 이 자들을 닥치게 해주시오. 우는 소리를 듣는 건 진력이 납니다. 자, 명령을 집행해 주십시오.
[경리] 네, 명령의 집행에 너무 오래 지체했습니다. 마침 때 맞춰 재촉을 하셨으니, 그럼 어디 해볼까. 당신은 곧장 나를 따라 감옥으로 갑시다. 거기가 당신 주거지가 될 거요.
[따르뛰프] 누가요, 내가요?
[경리] 그래, 당신.
[따르뛰프] 내가 왜?
[경리] 당신에게 그걸 설명해 줄 생각은 없지만, (오르공에게) 놀라셨겠지만 안심하십시오. 우리는 사기와 기만을 원수로 생각하시는 국왕의 통치하에 살고 있습니다. 폐하의 눈은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며 어떠한 사기꾼의 술책에도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어떤 일도 폐하의 마음을 당황케 않고 그 확고한 이성은 결코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유덕한 사람에게는 불멸의 영광을 내리시지만 폐하의 정열은 명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옳은 자를 사랑하시는 반면 빗나간 자들을 미워하십니다. 이 자도 폐하의 마음의 빈틈에 파고들지는 못했습니다. 폐하는 더욱 교묘한 함정을 마련해서 이 자로부터 몸을 지키신 겁니다. 폐하의 명석한 통찰력으로 이 자의 온몸에 깃들인 비열함을 진작에 꿰뚫어 보신 겁니다. 이 자는 당신을 고발하고 나섬으로써 스스로의 정체를 폭로하고 만 겁니다. 공평무사한 하늘의 심판, 이 자는 벌써 다른 이름으로 수배중인 이름난 사기꾼임이 폐하 앞에서 드러났습니다. 이 자의 수없는 범행을 일일이 기술하자면 아마 몇 권의 책이 될 것입니다. 요컨대 국왕께서는 당신에 대한 이자의 배은망덕한 배반을 미워하시고 되풀이되는 죄과의 끝맺음으로 이 죄를 추가하시기로 한 겁니다. 저는 폐하의 명령에 따라 이제까지 이 따르뛰프의 뜻대로 움직여 왔습니다만, 이전 한결같이 이 자로 하여금 파렴치의 극을 다하도록 하여 마지막에 당신에게 모든 걸 보상토록 하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 자는 당신의 서류 전부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만, 폐하께서는 그걸 이 배반자에게서 되찾아 당신에게 돌려주자는 뜻이었습니다. 당신이 전 재산을 이 자에게 증여한다는 계약서는 국왕의 권한으로 폐기하고, 또한 망명중인 친구와 밀통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건 지난 내란 때 당신이 성심성의껏 폐하에게 봉사한 데 대한 보상입니다. 폐하께서는 기대하지 않았을 때 받은 선행을 치하하시며 공적은 결코 잊으시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악보다는 선을 기억하고 계시다는 걸 널리 알리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하신 겁니다.
[도린느] 하늘에 영광이 있기를!
[빼르넬르 부인] 이제 살았다.
[엘미르] 아주 잘됐어요!
[마리안느]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요?
[오르공] (경리가 끌고 가는 따르뛰프에게) 어때, 배반자……
[끌레앙뜨] 아! 매부, 그만두시오. 이제 와서 점잖지 못하게. 불쌍한 자는 운명의 심판에 맡기고 마음대로 뉘우치게 내버려 두게. 그보다도 이 자가 오늘은 계기로 올바른 마음을 갖고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생활을 고쳐서 국왕의 심판에 너그러움이 있으시도록 기도나 해주게. 그리고 매부는 폐하의 각별한 후의를 받았으니 가서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려야 할 걸세.
[오르공] 네, 옳은 말씀입니다. 기꺼이 발밑에 엎드려 어지신 마음을 칭송하러 가야지요. 이 첫 번째 의무를 다하면 또 한 사람의 마음씨에 보답해야지. 연인으로서 너그럽고 성실함을 보여 준 발레르에게는 그의 소원대로 마리안느와 결혼하도록 해야겠어요.